제 2의 고향 취리히에서 보낸 학창시절
“고민이 있으면 카페로 가자.
그녀가 이유도 없이 만나러 오지 않으면 카페로 가자.
장화가 찢어지면 카페로 가자.
월급이 400크로네인데 500크로네 쓰면 카페로 가자.
바르고 얌전하게 살고 있는 자신이
용서되지 않으면 카페로 가자.
좋은 사람을 찾지 못하면 카페로 가자.
언제나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카페로 가자.
사람을 경멸하지만 사람이 없어
견디지 못하면 카페로 가자.
이제 어디서도 외상을 안 해주면 카페로 가자.”
-알텐 베르크
아인슈타인에게 이탈리아는 자유였다. 비록 고교 중퇴 신분의 ‘소년 낭인’신세였지만 전혀 기죽지 않는 팔팔한 자신감이 그의 무기였다. 아인슈타인 가족이 살고 있던 밀라노의 베르케트 2번가 아파트 근처에는 ‘밀라노의 응접실’이라고 불리던 멋진 카페가 많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카페 맨’이다. 그러니 밀라노에 카페가 많은 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17세기 말 프랑스 파리에서 최초로 등장한 이 카페는 해를 거듭할수록 유럽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잡아갔다. 프랑스의 유명한 여배우 시몬 시뇨레는 “오늘의 나는 1941년 3월의 어느 날 밤 파리 6구 생 제르망 거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유럽인들의 카페사랑은 대단했다.
프랑스 혁명의 맏아들을 자처했던 ‘마지막 황제’ 나폴레옹도 카페의 단골 손님이었다. 하도 카페에 자주 들락거려 월급을 송두리째 가져다 바칠 정도였다. 20세기 프랑스 대표적 지식인 부부로 알려진 사르트르와 시몬느 보봐르도 아예 카페를 직장 삼아 아침 9시에 출근해 하루 종일 카페에서 집필과 담소를 즐겼다. 그 유명한 파리의 카페 플로르 2층이 그들의 서재였다. 지금도 그들의 ‘자리’는 역사적 의자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카페가 있었기에 유럽 문화가 발전했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다.
그만큼 웬만한 유럽의 지식인이나 예술인들이 카페출입을 그들에게 부과된 의무이자 권리로 여기던 그 시절, 우리의 조숙한 소년 아인슈타인도 그런 ‘유럽의 트렌드’에 의젓하게 동참했다. 바로 집 앞에 있는 갈레리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라는 건물은 유럽 최초로 유리와 철로 만들어진 ‘신 건물’로 그 안에 있던 수많은 카페는 호기심 많은 소년의 단골 출입처가 되었다.
‘공부할 거리’를 들고 카페에 가서 죽치고 있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뮌헨과는 판이하게 다른 밀라노의 매력에 소년은 신이 났다. 아인슈타인의 이런 카페사랑은 그의 대학시절은 물론이고 그가 취리히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도 계속 이어졌다. 강의를 마치고 학생들에게 “나랑 카페 갈 사람?”하고 묻는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뮌헨 김나지움에서 억눌려있던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은 밀라노라는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도시가 주는 활력에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상상의 세계로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혼자서 배낭하나 메고 알프스를 넘어 제노바까지 도보여행을 하면서 심신을 단련해 나갔다.
1895년 봄부터 아인슈타인은 몇 달간 이탈리아 북부를 여행했다. 그냥 여행만 한게 아니라 틈틈이 공부도 열심히 했다. ‘자기장 속 에테르 상태’에 대한 리포트를 써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외삼촌 카이저 코흐에게 보내기도 했다. 돌아와서는 삼촌 야콥 아인슈타인의 사업을 도왔다. 야콥은 친구들에게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자랑 겸 늘어놓곤 했다.
그러나 삼촌이 그렇게 어렵다고 말하는 복잡한 계산 문제를 불과 몇 분 만에 풀어내 삼촌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기도 했다. 삼촌은 “우리 조카가 아주 큰 인물이 될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결국 말이 씨가 되어 아인슈타인은 대성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부친의 사업은 그곳에서도 신통치 않았다. 밀라노에서 헤르만 아인슈타인 형제들은 슈바벤에서 섬유업을 크게 하는 사촌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전기회사를 설립했다. 파비아 시에 전기 공급하는 계약을 따내는데 실패하면서 회사는 파산하고 말았다.
비록 어리지만 직관력이 뛰어났던 소년 아인슈타인은 부친에게 새로운 사업을 하지 말라는 ‘충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버지는 또 다시 회사를 설립했고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고교 중퇴라는 어정쩡한 자신의 신분에 못내 불안함을 느꼈는지 아인슈타인은 여동생 마야에게 “부모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프다. 결국 부모님께 짐이 되어 버렸어.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존재야”라고 한탄했다.
천하의 아인슈타인도 그렇게 신세 한탄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탈리아의 ‘기’를 받은 아인슈타인은 자신감에 넘쳐 입학시험 공부를 홀로 준비했다. 그는 아무리 주위가 시끄러워도 제 공부에 몰입하는 집중력을 갖고 있었다. 이 집중력이야말로 자신의 연구에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호기심과 인내력과 함께 집중력이야말로 힘든 물리학연구에 발판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 마지막에도 인내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세상에 인내만큼 쉽지 않은 감정노동이 어디 있겠는가. 오죽하면 ‘인내는 쓰되 그 열매는 달다’라는 격언까지 생겨났을까. 얼핏 생각하기엔 ‘천재 아인슈타인’과 인내는 거리가 먼 이야기 같지만 결국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이라는 에디슨의 말처럼 99%의 인내력만이 그의 명성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일 것이다.
천재도 그냥 하늘에서 떨어져 거저 천재가 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인내가 물리학자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은 많은 사람을 숙연하게 할 것이다. 세상에 어디 물리학에서만 인내가 알파요 오메가 이겠냐마는.
사업 실패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부모는 자나깨나 아인슈타인의 학업 걱정으로 노심초사했다. 그런 부모를 위로해드리려는 마음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앞으로 철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모된 입장에선 ‘철학’한다는 자식들의 소리는 철모르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법인가보다. 철학으로 밥벌이한다는 건 21세기인 요즘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닌데 19세기에야 오죽했을까.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비록 자신이 번번이 실패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기기술만한 밥벌이는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들에게 전기공학처럼 ‘기술’을 공부해야 앞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쉽고 ‘가업’을 이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설득에 나섰다. 부모의 간곡한 설득과 자신의 ‘현실’을 직시한 아인슈타인은 고교졸업장 없이도 진학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아냈다.
당시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 국립공과대학(Swiss Federal Polytechnical Institute)은 김나지움 졸업장이 없는 사람도 시험볼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새로 출현한 기술 전문단과대학으로 당시 알아주던 하이델베르크나 베를린 괴팅겐 같은 독일의 최고 종합 대학들 보다는 조금 낮은 등급의 학교였다. 김나지움 졸업장은 없어도 되었지만 학교 당국은 16세의 ‘건방진 고교 중퇴생’에겐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당시 공과대학의 학장 알빈 헤르조크는 아인슈타인의 입학을 주선한 아인슈타인부친의 친구에게 이런 답신을 보냈다. “학생이 아무리 신동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다니던 교육기관을 함부로 자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일반 교육을 마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시 신입생 입학연령은 18세였지만 아인슈타인 부모가 간곡히 부탁한 덕분에 16세의 아인슈타인은 일단 시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어학과 역사 점수가 형편없었다.
당시 물리학과장 하인리히 베버는 아인슈타인의 탁월한 과학점수에 주목하면서 가능하다면 자신의 강의를 들어도 좋다고 말했다. 베버 교수의 배려는 시험에 낙방한 그에게 큰 원군이 되었다. 이런 좋은 인연으로 시작한 그들의 만남은 나중에는 결국 ‘악연’처럼 끝나고 만다.
헤르조크 학장은 아인슈타인에게 취리히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아라우의 중등 주립학교에서 1년 간 공부를 할 것을 권유했다.
아라우 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소도시’로 유럽의 오아시스라 할 수 있는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오아시스’같은 지역이었다.
1895년 10월 스위스 최고 명문 중 하나인 아르가우 주립학교에 입학한 아인슈타인은 그야말로 ‘천국에서의 1년’을 보내는 행복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주립학교는 세계적인 교육학자 페스탈로치의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이해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육정신’을 바탕으로 학생중심의 교육제도를 실시했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던 ‘반항소년’ 아인슈타인에게 이 학교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명문교답게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낸 기록을 갖고 있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과 1937년노벨 화학상을 탄 파울 카러도 이곳 출신이다.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재6>아인슈타인 이야기 - 오만한 천재의 연애편지 (0) | 2008.10.14 |
---|---|
<연재5>아인슈타인 이야기- 연애편지를 잘썼던 꽃미남청년 (0) | 2008.10.06 |
<연재3>아인슈타인 길들여지지 않은 반항아, 김나지움을 자퇴한 뒤 밀라노 (0) | 2008.09.25 |
<연재2> 아인슈타인 이야기 (0) | 2008.09.22 |
<연재1>아인슈타인 이야기 (0) | 2008.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