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는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이듬해부터 뮌헨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고 그 수요는 엄청났다. 아인슈타인의 부친은 그의 동생들과 힘을 합해 사업체를 이끌어갔다. 사업은 처음엔 잘 나갔으나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면서 대기업에 선수를 빼앗겼고 결국은 사업을 들어먹고 마는 일을 되풀이 했다.
그런 와중이었지만 아들의 교육만큼은 일류로 시키고 싶어했던 부모는 뮌헨에서 알아주는 엘리트 김나지움에 아들을 진학시켰던 것이다. 이런 부모 마음을 알 자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 세상에 부모 마음 알아줄 자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국 자기가 부모가 되고나서야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숙명 아니겠는가. 천재 아인슈타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모의 속을 실컷 썩였던 이 천재 소년은 나중에 자신의 두 아들로부터 그가 저질렀던 ‘불효’를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인생유전을 당하고 만다.
부모는 죽어라 돈 벌어서 자식교육에 모두 쏟아 부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학생 아인슈타인은 그걸 감사하게 여기기는커녕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아는 게 많은 똑똑한 아이여선지 불평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그리 순탄하고 행복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지는 못했다. 적응력이 약했다고나 할까.
‘융화하기 어려운’조숙한 꼬마천재는 김나지움의 선생님들이 훈련대장 같아 좋은 감정을 갖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조직적이고 엄격한 교육 시스템이 학생들의 숨통을 막아놓는 것 같다는 게 소년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었다. 그리 유순한 성격은 아닌데다가 또래 아이들보다 생각이 깊었던 소년으로서는 엄한 교육을 시키려하는 선생님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 김나지움의 전교생은 1300 여명 정도로 적잖은 규모였다. 이 가운데 유대인 학생은 5% 정도였다. 학생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다.
당시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교 신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외아들이 가톨릭신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유대교를 믿는 집안에서 안식일에 가난한 탈무드 학자를 식사 초대하는 전통습관대로 아들의 ‘신앙 상담역’겸 가정교사 겸으로 뮌헨 대학 의과대학생을 집으로 매주 초대했다. 폴란드 유학생 막스 탈무트 (훗날 탈메이로 개명)대학생 형’과의 만남은 아인슈타인의 생애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종교에 일찍 눈을 뜬 소년은 김나지움에 입학하자마자 유대교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동급생들이나 선생님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맺지 못한 반작용 탓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유대교에 열성이었는지 소년 아인슈타인은 등하굣길에 부를 찬송가를 직접 작곡해 부르기도 했다. 유대교 신자라면 입에 대지 않는 돼지고기는 먹지 않았다.
물론 그의 부모들은 돼지고기 요리를 맛있게 해먹었다.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부모에게 ‘종교적 항의’를 했다. 스스로를 ‘비종교인 부모를 둔 아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다보니 ‘종교문제’로 부모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제 겨우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년이 찬송가를 직접 작사 작곡해 부르고 계율을 엄격히 지키겠다고 난리를 쳤으니 그 부모의 심정은 가히 어떠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하지만 천재소년의 부모와의 ‘종교전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린 아들의 극단적 종교편향을 막아보려고 매주 목요일 초대했던 그‘대학생 멘토’의 역할은 아인슈타인에게 눈부신 신세계를 펼쳐 주었다.
뮌헨대학 의과대학생 탈무트는 열세 살짜리 꼬마소년을 보는 순간 한 눈에 그의 ‘천재성’을 알아봤다. 탈무드는 아인슈타인에게 다양한 책들을 읽어보기를 권했다. 그가 권한 책들은 아인슈타인에게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지적인 신세계를 경험하게 했다.
독일 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의 ‘코스모스’를 비롯해 각종 유물론적 과학서적 특히 아론 베른슈타인의 유명한 저서들을 읽게 했다. 그가 쓴 ‘자연과학에 관한 대중서’라는 20권짜리 책들도 빌려줬다. 베른슈타인의 책들은 어린 아인슈타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아무리 천재라지만 이제 겨우 13세밖에 안된 소년에게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도 소개했다. 요즘 대학의 철학과 학생들도 읽기 어렵다는 칸트의 책들을 어린 소년에게 읽게 한 멘토도 대단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스펀지처럼 아인슈타인은 맹렬한 호기심으로 책 세상에 빠져 들었다.그런 난해한 책 내용에 몰입할 수 있었던 소년의 지적 능력도 대단했다. 당시 ‘지적 포만감’을 느꼈다는 어린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말이 떠오른다.
스스로 등하교용 찬송가까지 지었던 열 살짜리 ‘광신자’의 대단한 종교적 열정은 거의 모든 종류의 열정들이 그러하듯 어느 날 조용히 사양길로 사라졌다. 그 대신 이 천재소년에게는 과학과 수학이 새로운 종교처럼 다가왔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생형에게 받은 기하학 책 한권을 ‘기하학의 성서’로 명명하고 읽고 또 읽었다.
이 책을 공부하는 동안 그는 가뜩이나 몇 명 되지도 않는 친구들과 노는 일도 잊었고, 거의 모든 일상생활을 잊을 정도로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아인슈타인에게 ‘학문적 영향력’을 미친 사람으로 아버지의 동생인 야콥 삼촌을 꼽을 수 있다. 삼촌은 어린 조카에게 ‘수학하는 즐거움’을 가르쳐주었다.
직각 삼각형에서 직각을 끼지 않는 빗변의 제곱은 다른 두 변 각각의 제곱을 합한 값과 같다는 그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설명해 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공식을 스스로 검증해내는 놀라운 수학재능을 발휘했다. 야콥 삼촌은 또 대수학도 가르쳐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 기하학 예찬가였다. 그는 “유클리드가 당신의 젊음의 열정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당신은 과학적 사상가가 되긴 어렵다”라는 말로 유클리드 기하학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이 동급생들보다 훨씬 앞질러 학문적 ‘위업’을 달성해나가는 사이 같은 반 아이들은 그를 ‘공부벌레’라며 백안시하느라 바빴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다니고 있는 학교가 얼마나 좋은 학교인지는 제쳐두고 기계적 학습을 반복시키는 학습공장에 불과한 곳이라고 혹평을 해댔다. 이렇게 불만불평이 많다보니 자연이 선생님들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루이폴트김나지움의 엄한 선생님으로 유명했던 그리스어 교사 요셉 데겐하르트는 학생들 앞에서 “아인슈타인은 절대로 훌륭한 인물이 되지 못할 것이다”는 언어폭력 수준의 꾸지람을 했다. 그 선생님은 아인슈타인이 교실에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다며 나무라기도 했다.
독립심이 강하고 자존심이 셌던 아인슈타인을 선생님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반항아’로 여기는 듯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 겨우 열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에게 그런 식으로 야단쳤다는 것은 전후사정이 어떤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육적인 방식이라고 보긴 어려운 것 같다.
어린 아인슈타인은 이 일을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학교교육의 폭력성을 지적하곤 했다.
그 무렵 아인슈타인의 부친과 삼촌이 함께 운영하고 있던 사업이 완전히 망해 가족들은 모두 이탈리아 밀라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 15세였던 아인슈타인은 아직 김나지움을 3년이나 더 다녀야 했기에 뮌헨의 하숙집에 홀로 남게 되었다. 말하자면 ‘기러기 소년’이 된 셈이다.
가뜩이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그는 혼자서 끙끙 앓다가 ‘꾀’를 내기에 이르렀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라 부모에게도 처음엔 잘 지내고 있다는 말로 얼버무렸지만 김나지움을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가족을 떠나보낸 뒤 6개월 동안 말벗 하나 없이 지내던 그는 뮌헨 의대생 탈무드의 형인 의사 베르나르트에게 진단서를 한 장 부탁했다. 의사는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진단서를 써주었다. 수학선생님에게는 수학적 지식과 능력이 대학공부를 하기에 충분하다는 확인서를 받아냈다. 학교를 탈출하기 위해 나름대로 ‘요령’을 갖췄던 그 무렵 뜻밖에 담임교사로부터 학교를 나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허를 찔렸다고나 할까. 말하자면 ‘퇴교’처분을 받게 된 셈인데 그로서는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하자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에 네가 있다는 것 때문에 선생님에 대한 학생들의 존경심이 사라진다”라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해주었다. 그 담임교사가 바로 아인슈타인에게 ‘미래가 없는 아이’라고 꾸짖던 그리스어 교사 데겐하르트 선생님이다.
어쨌거나 ‘자의반타의반’으로 아인슈타인은 그토록 다니기 싫어하던 ‘교도소 같은’ 김나지움의 교문을 박차고 나와 밀라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의 여행 가방에는 나침반과 바이올린, 칸트와 수학 책이 들어있었다. 15세 천재소년은 단체생활을 강요하는 규율 엄한 학교를 그만 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용기백배해졌다. 이제 무언가 자신의 힘만으로 대단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자신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세상만사 새옹지마라는 말도 있듯이 아인슈타인이 퇴학 맞듯 명문학교를 나온 것은 그 당장으론 큰 손실처럼 보였지만 ‘출교처분’으로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인생을 맞게 되었다. 전화위복의 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만일 그가 김나지움에서 1년만 더 머물렀다면 그는 나이가 차서 징집을 당했을 것이다.
느닷없이 밀라노의 집으로 들이닥친 아들을 보고 아인슈타인 내외는 한숨부터 지었다. 기껏 힘들여 명문학교에 보냈건만 졸업장도 못 탄 채 부모 곁으로 온 아들의 장래가 너무 암울하게만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아들은 부모가 설득작전이라도 펼세라 다시는 뮌헨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독일 시민권도 포기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1894년 12월 말이었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아인슈타인의 부모 역시 세상의 평범한 부모였기에 똑똑한 자식의 앞길이 닫히는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뮌헨으로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100년 전, 19세기 부모의 그 마음은 21세기인 요즘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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