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6>아인슈타인 이야기 - 오만한 천재의 연애편지

스카이뷰2 2008. 10. 14. 10:45

 

                                                        <스위스 풍경,다음 카페 사진>

 

       천재가 사랑한 소녀와 브람스

 

아라우에서도 아인슈타인은 뮌헨시절과 마찬가지로 급우들이나 선생님들에게 ‘비호감의 존재’로 통했다. 오만한 천재는 어디서나 환영받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의도적으로 거만하게 군 것은 아닌 듯하다. 그냥 자신의 느낀 점을 숨기지 않고 말하다 보면 그것이 곧 타인에게는 오만으로 비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구를 뒤흔들 천재의 경지’를 일반인들이야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아라우 주립학교의 과학교사였던 뮐베르크 선생님은 영특한 아인슈타인을 무척 아꼈다. 학급 친구들과 함께 여행도중 뮐베르크는 아인슈타인에게 “여기서는 지층이 어떤 방향으로 형성 됐을까? 아래서부터 위 쪽 방향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선생님의 질문에 아인슈타인은 이런 식으로 답했다.

 

“어느 쪽으로 형성됐든지 제 눈엔 다 똑같이 보이네요.”이런 식의 말투는 듣기에 따라 꽤 시건방지게 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보통아이들 같으면 ‘글쎄요’라든지 혹은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속마음을 감출 줄 모르는 아인슈타인은 그냥 자기 식대로 말했던 것이다.

 

자기 자신은 의식하지 않고 말했겠지만 상대는 상처받을 수도 있는 화법. 이것이 늘 아인슈타인을 괴롭혔다. 나중에 그는 이런 ‘철없는’발언태도로 때때로 불이익을 당하곤 했다. 아인슈타인의 이야기 속에는 농담과 함께 때때로 상대방을 조소하는 듯한 말들이 숨어있어서 그 말을 듣는 당사자들은 당황해할 때가 적잖았다. 어떻게 보면 그런 그의 말버릇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사회 발전에 큰 공헌을 세운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건방진 태도’로 주위로부터 질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나마 아라우 주립학교의 선생님들은 뮌헨 김나지움 선생님들과는 달리 ‘뾰족한 천재’ 아인슈타인을 관용으로 감싸주었다.

아라우에서 보낸 10대 시절의 아인슈타인은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하는 시기여서 소녀 팬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한스 빌란트라는 학급 친구는 그 시절 아인슈타인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인슈타인이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듣고 처음으로 깊은 아름다움을 느꼈다. 시적인 영감마저 주는 그 음악소리를 들으며 남을 깔아뭉개버리는 취미가 있는 아인슈타인이 저런 아름다운 연주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강렬하고 섬세한 감정의 영역을 고슴도치 같은 표피로 보호할 줄 아는 분열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인슈타인은 감상적인 면을 극도로 싫어해서 아무리 흥분된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는 냉철한 성격이라는 게 빌란트의 증언이다.

그런 성격이기에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음악가들도 그의 성격대로였다. 바하 모차르트와 이탈리아와 영국의 고전주의 작곡가를 좋아했다. 정서적 표현에 능숙한 슈베르트도 좋아했다. 베토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베토벤의 음악이 너무 극적이고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슈만의 소곡들은 독창적이고 풍부한 감성이 느껴져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브람스가 작곡한 몇몇 가곡과 실내악도 좋아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바그너의 음악적 성향은 매우 공격적이라면서 대개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면 불쾌감만 생긴다고 강한 반감을 느꼈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바그너를 나치의 앞잡이 음악가라며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런 유대인들의 취향은 바그너의 음악회는 이스라엘에서 열리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히틀러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가 바그너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떠오르게 한다. 적이 좋아하는 것은 싫다는 것. 상대적이지 않는가.

 

아인슈타인은 연구로 한창 바쁜 시절에도 틈틈이 바이올린을 켰다.

‘리나’로 명명한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아무 곡이나 즉흥적으로 켜다가 영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차르트에게서 위로를 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무튼 아라우시절 연주가로서의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그의 매력에 힘을 실어주었고 당시 아르가우의 사범학교에 다니던 두 살 연상인 18세의 마리 빈텔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마리는 빈텔러의 세 딸 중 가장 예쁘장한 처녀였다. 마리 역시 피아노를 잘 치는 덕분에 아인슈타인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마마 빈텔러와 친엄마 파울리네는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축복했다. 아인슈타인의 예의바른 엄마는 마마 빈텔러에게 종종 감사편지를 전했다. 매사에 까다로운 자신의 아들을 잘 보살펴 주고 있는 또 다른 파울리네 여사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1895년 부활절 봄 방학 때 집으로 돌아간 아인슈타인은 마리에게 바로 연서를 띄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작고 하찮은 애인이여 그대는 내 영혼에 온 세상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입니다. 사랑스런 나의 천사!’그렇잖아도 ‘설탕 범벅’의 연애편지 쓰기에 소질이 넘치는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문장으로 마리의 영혼을 마비시켜버렸다.

 

또 다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사랑스런 따뜻한 햇살이 나의 행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절히 깨달았다’는 듣기에 좀 민망하지만 탁월한 연애감정을 적어보내기도 했다.  You are my sunshine! 이라는 20세기 팝송 가사가 떠오른다.

 

그 ‘뜨거운 사랑’이 식을까 불안해하는 연인에게 ‘키스의 벌’을 보낸다고 할 정도로 다정했던 이 어린 연인들은 모든 실패한 연애의 수순대로 서서히 냉각기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연인들도 20세기 팝송에서 나오듯 연인에게 ‘Seal with the kiss’의 연서를 보내는 연애를 했나보다. 

 

1896년 9월 아인슈타인은 졸업시험을 봤다. 6점 만점에 5.5 점으로 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다. 기하와 대수에선 만점을 받아 어린시절부터 인정받았던 수학적 재능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시험을 마치고 나자 자신이 전기기술자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론 물리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는 프랑스어 시험시간에 써낸 ‘나의 미래 계획’에서 취리히대학에서 수학과  과학을 전공할 것이며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썼다.   

  <행복한 사람은 현실에 만족하기 때문에 미래에 관해 많이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해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집중하기를 좋아한다. 만일 내가 운이 좋아 입학시험에 합격한다면 취리히에 있는 ETH에 진학할 것이다. 그곳에서 4년간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과학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칠 것이다. 내가 이런 계획을 세운 이유는 나는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를 좋아하고, 상상력이나 실천 능력이 부족한 점을 고려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어한다. 과학과 관련된 직업을 얻으면 좀더 많은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직업을 갖는 것을 꿈꿔본다.>

 

이런 짤막한 에세이에서도 우리는 아인슈타인이 얼마나 독립 지향적이고 완전한 자유를 갈망하는 지를 엿볼 수 있다.

10월 초, 아인슈타인은 소망한대로 취리히 공과대학(스위스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드디어 대학생이 된 것이다. 첫사랑의 농도는 어느 새 연해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때만 해도 마리 빈텔러와 드문드문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산골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던 마리는 ‘멀어져가는 연인’을 붙잡고 싶어 했다. 어떻게 해서든 연인마음을 처음처럼 되돌려 보려는 그녀의 편지는 아주 간절한 표현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당신이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고 싶어요. 당신의 방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꿔 놓고 싶어요. 그러면 당신은 전보다 훨씬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라고 적어 보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바람은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의 속마음을 너무도 몰라서 한 소리였다. 훗날 두 번에 걸친 결혼생활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아내에게 ‘절대로 내 서재는 건드리지 마시오’라는 엄명을 내릴 정도로 개인 생활을 엄격히 지켜내고 싶어 했다.

그러니 ‘헤어지고 싶은 연인’이 자꾸 방 정리를 해주겠다거나 영원한 내 사랑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을 적어 보내는 것이 아인슈타인으로선 참 난감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인슈타인은 빨랫감은 계속 그녀에게 맡겼다. 마리는 아인슈타인의 빨랫감을 받으러 한 시간 반이나 걸어서 역으로 가곤 했다. 멀어져 버린 연인을 그나마 붙잡아 보려는 마음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역으로 걸어가는 100년 전 그 아가씨의 발걸음이 너무나 무거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