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7>아인슈타인 이야기 - 파란만장한 러브 스토리

스카이뷰2 2008. 10. 20. 18:11

 

                                                    (헝가리 부타페스트 전경(다음 카페 펌) 

 

 

       아인슈타인 이야기 7- 파란만장한 러브스토리 서곡

 

번화한 취리히로 간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지적 자극을 받아 더 또릿또릿해진 모습으로 신나는 대학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자기 딸이 연인에게 버림받고 있는 중이라는 걸 모르는 마마 빈텔러와 아인슈타인의 가족은 그들이 맺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마마 빈텔러의 성령강림절에 다니러 오라는 초대장을 받자 조심스럽지만 현란한 문체로 자신들의 사랑이 끝났음을 완곡히 표현해 적어 보냈다.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더 많이 아파한다’는 연애의 법칙대로 마리 빈텔러는 실연의 아픔을 두고두고 치유해야 했다. 호된 첫사랑의 상처로 그녀는 한때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였다. 아인슈타인 역시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회상했다.

 

동생의 실연을 지켜본 언니 안나 빈텔러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아인슈타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편지를 그에게 보낼 정도였다.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깊어지는 것이어선지 아인슈타인의 변심에 빈텔러 가족들은 모두 좋지 않은 감정변화를 겪어야 했다.

 

첫사랑에 실패한 마리는 결국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았다. 마리는 3년간 시골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34세때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16년동안의 결혼생활을 이혼으로 마감하고 취리히로 이사해 그곳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화기애애하게 성장했던 집안이었지만 빈텔러 가에는 크나큰 비극이 닥쳤다. 아인슈타인이 마마 빈텔러로 호칭했던 마리의 모친 파울리네가 미국에서 막 돌아온 아들 율리우스에 의해 살해되었다. 신경병을 앓고 있던 아들은 또 다른 누이의 매부도 살해하고 자신은 자살로 인생을 끝냈다.

 

이런 처참한 사건을 겪은 후 마리는 당시 미국 시민이 된 아인슈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편지를 띄웠다. 체면불구하고 그녀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신을 미국으로 이민갈 수 있게 도와달라는 내용과 함께 돈을 보내 줄 것도 함께 부탁했다. 아무리 사랑이 사라진 사이라지만 한때의 연인이었던 사람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그녀로서도 무척이나 자존심 상할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옛 연인의 그런 요청에 묵묵부답이었다. 항간에선 그녀의 편지는 충직한 비서가 전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마리는 결국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미국 대신 한 수용시설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어린 시절 잠시 사귄 연인에게 그런 식의 부담스런 요청을 했다는 건 아무래도 아인슈타인이 쌓아올린 세계적 명성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수십년 전 잠시 사귀었던 사람에게 그런 구차스런 부탁을 한다는 자체가 오늘 날의 잣대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싶다. 설령 그가 실연의 가해자라해도 그것이 그리 큰 범죄는 아닐 텐데...

 

반면 아직 학생신분의‘철없는 천재’ 아인슈타인은 자기변명의 편지를 열심히 썼다. 편지쓰기 실력 역시 남달리 뛰어난 그로서는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학문의 방호벽에 기댔다.

그는 ‘학문에 대한 집념과 지적 탐구욕만이 나에게 닥친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의 세계에서만이 비로소 안락함을 느끼는 그는 이미 ‘보통사람’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오직 학문 연구를 항상 우선시했고 연구를 방해하는 요소에 대해선 어떻게 해서든 회피하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이 겪어야할 일상의 고통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스스로가 거부의 벽을 단단히 쌓고 오로지 학문만이 자신을 구원해주는 안식처라는 확신은 그의 미래에도 계속 적용됐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그의 또 다른 전공분야의 하나인 ‘연애생활’을 완전히 외면하거나 혹은 소홀히 했냐면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첫사랑 연인에게 쓰라린 실연을 선사할 즈음, 또 하나의 ‘치명적 사랑’을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랑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인생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 사랑의 그림자로 인해 고통을 받는 그런 ‘무서운 사랑’의 결말을 맞아야 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어느 연애에서나 마찬가지처럼 달콤하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감정의 극치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한마디로 ‘운명적 사랑’을 취리히 대학 캠퍼스에서 만난 것이다. 바로 같은 학과의 밀레바 마리치가 바로 그 ‘운명의 히로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서로에게 ‘악연’의 사슬을 덧씌운 그들이지만 처음에는 더할 나위 없이 가슴 떨리는 첫사랑이었다. 어쩌면 사랑의 속성 중에는 이렇게 잔혹한 운명의 파국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서 시작한 사랑도 인생에 크나큰 아픔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인간은 사랑을 끝내고나면 또 새로운 사랑에 빠지게 되나보다. 모든 사랑은 항상 첫사랑인양 착각하듯, 아인슈타인은 이미 혹독하게 첫사랑을 배신한 주제였지만 ‘언제나 첫사랑’인 듯 새로 찾아온 밀레바라는 사랑에게 뜨거운 경배를 바치기 시작한 것이다. 악연의 운명인지는 까맣게 모른 채.

 

  제2부 파란만장 러브스토리        

     

   치명적 사랑과의 운명적 만남


아인슈타인은 1896년 10월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대망의 대학생이 된 것이다. 1855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물리학과 수학과목의 강의수준은 유럽의 독일어권 대학 중 가장 우수했다.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취리히는 스위스에서 제일 큰 도시였다. 정치적인 안정과 함께 맑은 공기와 자유로운 분위기는 세련된 도시이미지를 갖추는데 손색이 없었다. 그 무렵  취리히에는 세계적 수준의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이 속속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칼 융은 취리히의 도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취리히는 지성이 아니라 상업으로 말한다. 이 도시는 부유한 문화적 배경이 없지만 오랫동안 쌓인 짙은 안개가 어깨를 짓누르지 않는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엔 헤르만 헤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제임스 조이스 같은 유명인사들이 취

리히에 살았다. 제 1차 세계대전의 대학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다다이즘의 발생지로 이와 관련있는 많은 예술가들이 살고 있었다. 오늘날의 히피와 비슷한 이미지의 다다이스트들은 반 예술, 반지성을 기치로 내세우며 기존의 사상적 권위를 우습게 여기는 반항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권위라면 어린 시절부터 ‘반기’를 들며 저항적인 태도를 보였던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의 그런 도시 분위기에 매료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목표한대로 수학과 물리학 교사를 육성하는 제 4학과에 등록했다. 클래스메이트는 그를 포함 모두 5명이었다. 아인슈타인이 17세로 제일 어렸고, 귀공자 스타일의 키가 큰 마르셀 그로스만과 루이스 콜로스가 18세, 취리히 대학에서 전학 온 야콥 에라트가 스무살이었다.

 

이중 홍일점 여학생인 밀레바 마리치가 21세로 가장 연장자였다. 바로 훗날 아인슈타인과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세르비아의 이 수재 여학생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1896년 입학 당시만 해도 그녀는 ‘홍일점’ 여학생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면서 주목받는 위치에서 활발한 학창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지만 카리스마가 있는 아가씨였다. 강렬한 눈빛에서 자존심과 자부심이 넘쳤다.

 

 1875년 헝가리에서 출생한 밀레바는 대부분 또래의 동유럽 여성들이 학교를 다닐 수 없던 시기에 ‘힘 있고 개화한’부친의 열성적인 교육열 덕분에 호사를 누리며 스위스 유학까지 온 선택받은 여성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의식도 뚜렷했다. 언제나 조용하면서도 공부에 전념하는 학구파 여학생이었다.

 

 그 무렵, 취리히는 교육받은 여성들의 천국이어서 유럽 각국의 엘리트 여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유럽에서 여성에게 최초로 박사학위를 수여한 곳도 스위스의 대학이었다. 그만큼 학문적으로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유럽 각지에서 몰려드는 엘리트 아가씨들은 취리히를 자신들의 정신적 메카로 여겼다.

(다음 주 월요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