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리히의 전원주택(사진은 다음 카페에서)
만년의 아인슈타인
구직난에 시달렸던 비호감 천재의 혁명적 생각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2월 어느 날 밤 음악 모임에서 그는 ‘평생 친구’가 될 미셸 안젤로 베소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로마 대학을 다니다가 취리히 공대로 옮겨와 1895년 공학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베소는 사교적이며 영리했다. 물리학에 나름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베소 역시 유대인이었다. ‘서로를 알아본’ 두 남자는 4시간 가까이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즉석에서 의기투합해 ‘도원의 결의’를 맺었다. 아인슈타인은 얼마 후 베소의 중신아비 노릇도 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획기적인 과학 이론을 듣고서 조언해줄 정도의 실력자였다. 베소의 조언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전기 공장에 다니던 베소에게 자신의 애인이었던 마리 빈텔러의 친언니 안나를 소개해줬다. 두 사람은 1898년 결혼해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50년 넘게 해로했다.
1955년 베소가 죽었을 때 아인슈타인은 그의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문상편지에서 “인간으로서 무엇보다도 그에 대해 감탄하는 것은 평생 동안 한 여성과 그것도 사이좋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두 번이나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는데...”라며 그를 기렸다. 아인슈타인은 또 “그는 나보다 조금 먼저 이 이상한 세계를 떠난 것뿐입니다.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물리학자들이 믿고 있는 미래 현재 과거의 구별은 단지 집요한 환상에 지나지 않으니까요.”라고 적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사생관(死生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을 평하는데 일가견을 갖고 있는 아인슈타인은 베소를 두고 이렇게 상반된 품평을 하기도 했다. “베소는 아주 건실한 사람이다. 비록 그의 연구스타일은 어수선하지만 그가 연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스럽다.” 그러나 한참 뒤 아인슈타인은 베소가 생동감도 부족하고 허약한데다 과학연구를 하는데도 방향성을 정하지 않고 흔들리는 사람이라고 혹평을 해댔다.그래도 베소는 훗날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참혹한 결혼생활의 고통을 호소하며 상처받은 가슴을 위로받고 싶어 할 때 그의 다부진 어깨를 빌려주는 ‘진정한 친구’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1899년 졸업반이 된 아인슈타인에게 실험 물리학과 장 페르네트 교수는 강의를 자주 빠지는 것에 대해 정식으로 경고를 주었다. 그동안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만 집중적으로 듣고 다른 과목은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는 ‘학생으로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편안한 방법을 연구했고, 학문적 관심과 취향에 맞는 공부 방법’을 나름 조절해내는 ‘수완’을 발휘해내 스스로 만족한 학창생활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자서전에서 ‘집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위대한 물리학 학설을 공부하는데 몰두했다’고 밝히고 있다.
‘천재의 공부비법’이라고 하기엔 다소 코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그해 7월 아인슈타인은 모처럼 실험실에서 실습을 하다가 폭발사고를 당했다. 페르네트 교수는 가뜩이나 ‘불성실한 학생’으로 느끼고 있는 학생이 사고마저 낸 데 내심 못마땅했는지 아인슈타인에게 “자네는 아무래도 능력이 부족한 것 같네”라고 주의를 주었다.
페르네트 교수는 물리학처럼 정밀함이 요구되는 학문에 아인슈타인처럼 ‘멋대로 노는’학생은 맞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 같다. 아인슈타인에게 그는 “물리학 보다는 의학이나 법학 아니면 철학을 공부해 보라”는 조언도 했다. 만약 지도교수로 부터 그런 심각한 ‘배려어린 충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물리학계의 판도는 과연 어떻게 바뀌었을까 자못 궁금하다.
누구의 조언이든 귓등으로 듣는 성향이 있는 아인슈타인은 교수에게 그런 충격적인 꾸지람을 듣고서도 자신의 과오를 바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뚝심과 자기에의 믿음이 ‘상대성 이론’을 창출해내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단지 그는 수학이 물리학을 연구하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섣불리 내리고 수학을 조금 등한시 한 것에는 두고두고 후회를 했다. 아인슈타인에게 수학을 가르쳤던 헤르만 민코프스키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게으른 개’라고 혹평했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일반상대성 이론을 연구하기 전까지 수학은 물리학 연구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물리학은 근본적이고 직관적이고 구체적인 과학이며 수학은 현상을 통괄하는 법칙을 표현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물리학자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명쾌하게 드러내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자서전에서 “나는 자연과학에 한참 심취해 있었고, 어렸던 탓에 물리학 원론의 심오한 지식은 복잡한 수학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대학시절 아인슈타인은 많은 교수들의 눈밖에 나버렸다. 심지어는 그가 처음 공과대학 시험을 쳤을 때 아인슈타인의 탁월한 과학성적을 눈여겨보고 자신의 강의를 듣도록 특전을 베풀었던 베버 교수와도 심각한 갈등 관계를 빚고 말았다.
당시 베버 교수는 학생들 사이에 ‘명 강의’로 인기가 높았지만 아인슈타인은 교수의 수업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베버 교수 역시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때까지 ‘절대적 위치’를 점유한 채 300년 가까이 ‘이론 물리의 대부’로 존경받아온 뉴턴의 기계적 세계관은 재고되어야 한다는 ‘혁명적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일개 대학생의 그런 도전정신이야말로 그를 뉴턴 이후의 물리학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새로운 물리학의 대부’ 자리에 올려놓았을 것이다. 장강의 뒷물이 앞물을 치고 나가듯 세계 물리학계도 이 ‘의심 많은 천재 물리학도’에 의해 서서히 그 판도가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혼자 공부해 나갔다. 그는 “졸업할 때 우리는 과거의 물리학에 대해선 모든 것을 배웠지만 물리학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는 배운 것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루트비히 볼츠만이나 HA 로렌츠, 에른스트 마흐와 같은 당시 최신 이론 물리학자들의 책을 읽으며 독학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물리학의 터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특히 로렌츠를 사숙하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 “로렌츠는 경이적인 지성과 예리한 감각을 지닌 분이다. 살아있는 예술품이다. 내가 아는 이론가들 중엔 그가 가장 뛰어나다. 물리학의 발달에 로렌츠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위대한 지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그토록 위대한 로렌츠의 공헌이 없었다면 물리학이 어떻게 돌아갔을지 상상이 안 간다.”
이토록 호·불호가 분명한 아인슈타인의 처신은 그를 가르치고 있는 대부분의 공과대학 교수들에게 학생 아인슈타인에 대해 ‘비호감’을 느끼게 했다.
베버 교수는 아인슈타인을 불러 “자네는 똑똑한 학생이지. 굉장히 총명한 학생이야. 하지만 큰 단점이 있어.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교수에게 이 정도로 심한 꾸지람을 들었으면서도 그는 그리 크게 신경 쓰는 듯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동안 그를 두고 주변에서 해온 말들이 대학에 와서도 계속 되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래도 그의 신경이 무뎌져버린 탓도 있을 것이다.
여동생 마야는 아인슈타인이 어린 시절부터 건방지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무례한 아이’로 불려 지기도 했다고 한다.
좁은 대학사회에서 여러 교수로부터 ‘좋지 않은 소리’를 듣다보니 졸업 후 그는 엄청난 구직난을 겪어야 했다. 우스운 것은 베버 교수를 그렇게 무능하다고 불평한 아인슈타인이었지만 졸업 후 그는 베버 교수의 조교자리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보통사람들이라면 교수에게 그렇게 심한 질책을 받았다면 ‘조교 자리’는 물 건너 갔다는 걸 알았을 텐데 ‘천재’ 아인슈타인에겐 그런 보통사람의 감정지수가 부족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을 제외한 3명의 입학동기 남학생들은 모두 취리히 공과대학의 조교자리를 무난히 얻었다. 당시 물리학계에 영향력이 꽤 컸던 베버 교수는 아인슈타인이 다른 교수의 조교로 들어가는 것조차 방해를 해 아인슈타인은 계속 ‘실업자’신세를 면하기 어려웠다. 1912년 베버 교수가 세상을 뜨자 아인슈타인은 ‘그의 죽음은 취리히 공과대학을 위해 좋은 일’이라는 극언까지 할 정도로 베버 교수를 사무치게 원망했다.
일반사람들이라면 웬만큼 감정이 틀어진 사이라 해도 ‘죽음’앞에선 관대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죽음을 맞이한 지도교수에게 ‘막말’을 해 독설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인시켜주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돌아서버린 데에는 아무래도 밀레바라는 여학생과의 연애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싶다. 일찍이 밀레바를 돌봐야할 입장이 된 그로서는 졸업과 동시에 바로 안정적인 직장을 잡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사정은 어찌되었든지 베소 교수의 ‘방해공작’으로 자신과 밀레바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다는 점은 그로 하여금 그같은 독설을 뱉어내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세파에 시달린 나머지 그 사이 온갖 파란만장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쌓여진 강한 증오의 마음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여 진다.
*(다음주 월요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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