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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0>아인슈타인 이야기- 당대 최고 알파걸 첫 아내 밀레바

스카이뷰2 2008. 11. 10. 09:46

 

                                                  취리히의 전원주택(사진은 다음 카페에서)

 

   당대 최고 알파걸, 첫 아내 밀레바

 

자! 이제 여기서 우리는 아인슈타인의 첫 결혼 상대자 밀레바 마리치라는 명석했던 한 여인의 생애로의  탐험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까다롭기 그지없는 천재 아인슈타인을 상대역으로, 인생극장의 비운의 히로인 역을 맡았던 밀레바는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그 여성 하나만 놓고 봤을 때는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당시로는 아주 드문 최고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로,  그 시대의 당당한 ‘알파 걸’로 그녀 앞에는 오직 행복한 미래만이 펼쳐져 있을 것 같았다.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낸  밀레바는 세기의 천재와의 결혼생활을 통해‘인생의 온갖 신산’을 맛봤고, 결국은 ‘남편 복 없는’여인으로서 혼자 쓸쓸하게 죽어갔다.

 

밀레바 말리치의 삶이 보여주는 온갖 눈물 나는 장면들을 보면‘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가여우면서도 딱한 밀레바의 인생이지만 젊은 시절 한때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에게서 수백 통의 '연서(戀書)'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는 그녀를 마냥 가여운 여인으로 밀어뜨리지는 않는 보호벽 역할을 해주고 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그녀는 계속 나락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전형적인 비운의 여인이었지만 그래도 그녀 인생의 ‘봄날’엔 아인슈타인이라는 천재 청년의 달콤한 유혹이 그녀를 잠시나마 행복한 로맨스로 안내해 주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그 자체로 행복한 체험이었다고 위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연애편지의 명수 아인슈타인이 그녀에게 보낸 꿀물이 뚝뚝 묻어날 것 같은 당도 높은 편지를 보다보면 웬만한 사람들도 포근한 연애감정에 빠져 들 정도다. 그러니 당사자인 밀레바는 오죽했겠는가.


다뉴브 강의 연인-밀레바 마리치

 

“전에는 나 혼자 어떻게 살 수 있었는지 모르겠소. 내 사랑, 당신 없이는 일에 대한 자신감도 열정도 생기지 않고 인생의 기쁨도 맛볼 수 없는데 말이오. 한마디로, 당신 없는 삶이란 내게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오.(아인슈타인이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 중)

 

아인슈타인의 홍일점 클래스메이트 밀레바 마리치는 취리히로부터 1천km 떨어진 머나먼 헝가리의 시골 마을 카츠에서 1875년 12월19일 태어났다. 그녀는 선천적으로 한쪽 골반에 장애가 나타났다. 이런 장애는 몬테네그로 민족의 여성들에겐 드문 것이 아니어서 여동생 조르카도 같은 장애를 지니고 태어났다. 그녀들은 성장하면서 한쪽 다리를 눈에 띄게 절었다. 그녀의 부모는 딸들이 자라서 제대로 시집가기 힘들다며 늘 걱정에 휩싸여있었다.

 

밀레바는 다뉴브 강 상류 쪽의 시골마을이었지만 25만 평 토지위에 세워진 3층짜리 석조건물에 살 정도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달리 총명한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다.

밀레바의 아버지 밀로스는 헝가리 정부의 법정사무관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다. 강인하고 과묵한 성격의 밀로스는 세르비아인이었지만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는 대학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대단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에서 성공하려면 독일어를 써야만 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자녀들에게도 독일어로 말하게 했다. 그는 딸들에게 틈만나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100여 년 전의 부모도 역시 자녀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신체적 장애 탓인지 밀레바는 친구들과 사귀기보다는 홀로 공부하는 데 더 재미를 느꼈다. 그녀는 특히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그녀를 가르친 선생님 한 분은 학교를 찾아온 밀레바의 아버지에게 “아주 비범한 아이입니다. 계속 뒷바라지 해주세요”라는 말을 했다. 가뜩이나 딸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아버지로서는 무척 듣기 좋은 말이었을 것이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학교를 전학 다녔지만 밀레바는 어디서나 ‘수석’을 놓치지않아 부모에게 기쁨을 선사했다. 밀레바는 수학 뿐 아니라 예능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그녀는 당시 여학생은 입학금지라는 조항이 있던 자그레브의 김나지움에 들어가기 위해 행정기관에 이의신청을 제기해 ‘예외 승인’을 받아냈다.

 

100년 전 향학열에 불타는 부녀는 그렇게  용감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립 김나지움에서 남학생들과 함께 공부한 최초의 여학생이라는 영광을 안았다. 그곳에서도 수학과 물리학에서 최고 점수를 놓치지 않았다. 이렇게 명석한 딸을 보면서 그녀의 아버지는 스위스의 대학으로 유학보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스위스는 ‘오아시스’같은 지역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맑은 공기와 최신식 온천장으로 유럽인들이 가보고 싶은 1위 지역이었다.

그때만 해도 유럽의 대학들은 여성들에게 정규학생이 될 기회는 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취리히는 ‘개화된 문명지역’이었다.

 

여성들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입학자격을 주었다. 취리히 종합대학교는 1867년 유럽 최초로 여성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영광의 기록’을 남겼다. 이 소식에 고무된 유럽 전역의 여학생들이 취리히로 달려왔다.

 

밀레바도 친구들과  함께 스위스로 건너왔다. 그녀는 취리히 종합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다. 그녀가 의학부에 진학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두 가지 정도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우선 그녀 자신과 여동생 조르카의 신체장애를 꼽을 수 있다. 여자아이로서 어릴 때부터 절름발이라고 놀림받으며 성장했기에 마음에 상처가 컸을 것이다.

 

요즘도 집안에 환자가 있거나 자신이 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장래소망을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걸 참조한다면 100년 전 다리가 불편했던 총명한 소녀가 왜 의과대학에 진학했는지를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하나는 그 무렵 취리히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한 세르비아 여성 드라가 료치치의 맹활약을 들 수 있다.그녀는 세르비아의 여러 전쟁터에서 여의사로 구국의 전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당시 세르비아 여자 어린이들의 ‘우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첫 우주인이 된 이소연씨가 소녀들의 우상이자 역할모델로 자리잡은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여기에 그녀의 부모도 의사가 된 딸의 모습을 보고 싶어 했을 것이라는 걸 덧붙일 수 있겠다.

 

아무튼 수학과 물리학에 남다른 재능을 과시했던 밀레바는 일단 의과대학생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녀가 묵었던 취리히 플라텐 가 50번지의 하숙집은 발칸 반도와 동유럽 여학생들에겐 거의 ‘공인 기숙사’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몰려온 당시 엘리트 여학생들은 함께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며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밀레바의 친구 밀라나는 그녀가 상당히 똑똑하고 아주 착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학생으로서의 그녀의 ‘미모’에 대해서는 짠 점수를 주고 있다. 키가 작고 거무스름하고 못생겼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밀레바의 목소리가 ‘미성’이라는 것은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친구들에게 자신의 애인을 자랑하면서도 나온다. 친구들이 애인이 못생겼다고 놀리자 아인슈타인은“하지만 목소리는 예쁘잖아”라고 응수했다.

 

일본에서는‘목소리는 마음이다’라는 속담도 있다지만 얼굴보다는 목소리를 높게 쳐준다는 건 상당히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얼굴은 꾸며낼 수 있지만 목소리는 위장하기가 어렵다. 그 사람의 심성이나 지성을 평가하는데는 얼굴보다 목소리가 주요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건 요즘 세상에도 통하는 것 같다.

 (다음주 월요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