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명수 아인슈타인의 '작업' 스타일
밀레바의 프레시맨 시절 흑백사진을 보면 친구들 말처럼 그리 예쁜 얼굴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총기 넘치는 눈빛을 보면 밀레바의 지적 수준은 상당히 높아 보인다. 밀레바는 친구들로부터 재치 있는 여학생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는 웃지 않으면서도 친구들을 깜빡 죽도록 웃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밀레바는 1896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의 특별 전형을 통과한 뒤 가을학기부터 수학·물리학과 제4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홍일점이었지만 그런 상황은 그녀에겐 늘 익숙했다. 헝가리에서는 ‘여학생 입학금지’조항에 이의를 달면서까지 공부했던 ‘투사적 여학생’경력이 있기에 그녀는 오히려 홍일점 상황 따위는 전혀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단지 다부진 체구에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인슈타인이라는 독일 남학생이 다소 부담스러웠다.
걸걸한 목소리로 노트를 빌려달라고 하거나 별로 어렵지도 않은 문제에 대해 계속 말걸기를 시도하는 그 남학생이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달변의 그가 보이지 않는 날에는 그의 안부가 궁금하기 조차했다.
밀레바는 우수한 성적표를 들고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간 뒤 아버지에게 학과 공부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함께 아인슈타인이라는 남학생의 존재에 대해 ‘보고’했다. 아버지는 딸로부터 처음 듣는 남학생 이름에 관심을 갖고 학기가 시작되면 그에게 담배선물을 갖다 주라고 했다. 아마 밀레바의 뇌리에는 아인슈타인이 카페에서 줄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이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녀의 마음에는 이미 아인슈타인의 존재가 서서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는 얘기다.
1897년 가을 밀레바는 뚜렷한 이유 없이 휴학을 한 뒤, 독일의 유서 깊은 대학도시 하이델베르크로 갔다. 그곳에서 밀레바는 필립 레나르트 교수의 물리학 수업을 청강했다. 이 교수는 훗날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타지 못하도록 ‘아인슈타인노벨상 수상저지 100인 위원회’까지 결성해 오랫동안 그의 노벨상 수상을 방해한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70여 년 전에도 노벨상 위원회에 수상로비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노벨상’의 위상은 꽤 높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지만 이에 대해서도 수상로비를 했네, 혹은 수상반대 로비를 했네, 라는 잡음이 얼마 전까지도 계속되기도 했다. 무슨 로비를 한다고 통하는 노벨상이 아닐텐데...
어쨌든 밀레바는 당시에 ‘명교수’로 이름 날리던 레나르트 교수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던 것 같다. 그녀가 느닷없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간 것에 대해 일부 전기 작가들 사이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적극적인 공세가 그녀를 부담스럽게 했기에 ‘도피성 유학’이었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얘기 같다.
학업에 뜻을 세워 고국에서 1000km나 떨어진 스위스까지 공부하러 온 엘리트 여학생이 처음으로 이성의 뜨거운 눈길을 받는다는 건 견디기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인슈타인의 성향으로 봤을 때 그가 얼마나 열렬히 그녀에게 다가갔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 일이다. 훗날에도 그랬지만 소년시절에도 아인슈타인은 ‘연애의 명수’로 소문이 자자했다.
밀레바가 취리히로 돌아오지 않고 하이델베르크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아인슈타인은 그녀에게 4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밀레바를 ‘사랑스런 도망자’라고 호칭하면서 하루빨리 돌아오라고 썼다. 아무래도 두 남녀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니 사랑의 도망자라는 단어를 사용했겠지.
한달 뒤 그녀는 답장을 보내왔다. 편지에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아인슈타인의 존재에 대해 알렸다며 아버지와 당신은 잘 통할 것이라는 말까지 적었다. 물론 아버지의 담배 선물에 대해서도 말했다. 꽤 의미 있는 편지였다. 이미 두 사람은 ‘연인의 길’에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밀레바가 오기 직전까지 아인슈타인은 부친의 사업이 또 파산했다는 우울한 소식을 듣고 가슴을 쳤다. 그는 동생 마야에게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 나는 오로지 학업에 전념하는 길밖에 없다”고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다.
그나마 밀레바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아인슈타인은 다소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사랑의 힘이 그를 일으켜 세워 준 것이다.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간곡한 편지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1898년 4월 취리히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밀레바에게 다가가 그동안 공부에 진도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라고 걱정해주며 노트를 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밀레바는 밤샘 공부를 하며 뒤쳐진 학업에 전념했다. 그 무렵 아인슈타인은 공부지도를 빌미로 그녀의 하숙집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젊은 남녀가 거의 매일 좁은 하숙방에서 학문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듬해 밀레바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인슈타인은 ‘은밀한 표현’으로 두 사람 사이의 연정을 확인하려 했다. “우리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때부터 아인슈타인은 더 자주 밀레바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최신 물리학자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밀레바의 동참을 호소했다. 앞으로 함께 연구하자는 말을 꼭 덧붙였다. 연애와 학문을 병행해 나가자는 제안은 학구파인 밀레바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게다가 밀레바는 당시 물리학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볼츠만이나 로렌츠, 헬름홀츠, 마흐 같은 학자들에 대해 카페에서 공부하자는 아인슈타인의 말에 스스로도 물리학자들의 반열에 들어선 듯한 기분좋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의 물리학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제안대로 최신 물리학 이론들에 대해 열띤 토론을 새벽까지 했다. 그 사이 그녀는 친구들에게 남자친구 아인슈타인을 소개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주변 친구들은 시샘 반 부러움 반으로 그 둘에 대해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시대를 초월해 일어나는 일 같다. 동성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다가 어느 한 사람이 이성친구와 열애에 빠진다는 소문이 돌면 그 순간부터 ‘연애중인 친구’는 열외 시키는 일들이 적지 않다. 오늘날 인기 톱스타들도 자신들의 ‘열애설’은 일단 극구 부인하는 것도 그런 ‘남녀 간 상대성 원리’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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