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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17>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렸던 청년 아인슈타인

스카이뷰2 2008. 12. 26. 16:15

 

 

 

 

    극심한 취업난에 시달렸던 청년 아인슈타인

 

1900년 여름, 같은 시기 고향집에 내려가 있던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의 모친의 냉랭함에 큰 충격을 받고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쓰는 일 조차 꺼려하고 있었다. 그녀는 파울리네가 자신을 몹시 싫어한다는 소리를 듣고 난 이후 하루도 편한 마음으로 보내기가 어려웠다.

 

아인슈타인의 편지 내용에 따라 일희일비하면서 될수록 공부에 집중해보려 했지만 예전의 총명함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공부에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이렇게 두 연인이 고단한 연애생활을 이어나가던 그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다.

 

아인슈타인에겐 결혼문제보다 더 심각한 ‘현안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취업이었다.

일단 졸업은 했지만 취직을 못한 실직자여서 부모를 볼 면목도 없었다. 그는 취리히 공과대학의 조교자리를 얻고 싶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모교 교수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해 동급생 중 유일하게 조교자리마저 얻을 수 없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지도교수 눈치를 봐가면서 일자리를 알아봐야할 처지여서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렇다고 가정형편상 공부에만 전념할 입장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1주일에 8시간씩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푼돈을 벌었다.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급우 엘라트로부터 일당 8프랑의 임시직을 제안 받았다.

 

아무리 아쉬워도 차라리 그 시간에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이렇게 구직난에 애를 태웠지만 낙천주의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있다’는 밝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지금 대한민국 20대 청년백수들 못지않게 엄청난 취업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주로 학생들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했다.

 

세상을 바꾼 물리학 이론을 만들어낸 아인슈타인이었지만 초년고생은 이루 말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취업하기 위해 이력서를 동봉해 보낸 편지만해도 수십통이 넘었다. 조교자리를 얻기 위해 유럽 여러 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들에게 그는 '눈물어린 이력서'를 보냈지만 어느 한 곳에서도 자리를 만들어주진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아인슈타인은 아니었다. 그는 늘 '근거없는 낙천주의자'로서 자신의 미래는 푸르다고 장담했다. 

 

한편 원래 우울증세가 있던 밀레바는 비관주의자였다. 제때에 졸업 못한 것만도 남부끄러운 일인데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연인 아인슈타인마저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것은 그녀를 더 시름에 잠기게 했다. 지금도 여성차별이 심한데 100년 전 그 시절에야 오죽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