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신기’가 주인공인 소설(팬픽)책 판매현장에서
얼마 전 구세대인 저는 참 재미있고도 희한한 구경을 했습니다. 서울 명동의 한 카페에서 일어난 일인데요, 요즘 10대, 20대들의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목격함과 동시에 세대 간 격차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후 3시 30분쯤 제가 앉아있던 카페 2층으로 앳된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왔습니다. 곧 이어 큰 박스를 든 조금 나이든 여성들이 올라왔고, 그녀들은 박스를 개봉하고 비닐커버로 밀봉했던 책을 한 권씩 꺼내 책뚜껑을 열고 무언가를 적고나서 기다리던 소녀들에게 나눠주었습니다.
마침 제 옆 테이블에 아주 앳되고 귀여워 보이는 소녀 둘이 방금 받아온 그 책을 열어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무언가 소곤거리고 있더군요.
소녀들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로 “니네 중1이지?”라고 말을 건넸더니 소녀들은 매우 놀라는 표정으로 “어떻게 아셨어요?”라고 되물었습니다.
저는 “너희들 얼굴에 써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들은 아기들처럼 귀여운 표정으로 웃더군요. 아주 해맑아 보이는 소녀들이었습니다.
소녀들이 보던 그 책을 잠시 펴봤습니다. 책 제목은 ‘혀 깨물기’ 저자의 이름을 아무리 찾아 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어느 출판사인가 살펴봤는데 출판사 이름도 아예 없었습니다. 연한 핑크와 보랏빛이 섞인 듯한 하드카버의 그 책은 꽤 두꺼워 한 700페이지가 넘는 것 같았습니다.
“이거 왜 저자 이름이 없니?”라고 물었더니 소녀들이 거기 ‘목욕물’이라는 이름이 바로 저자 이름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목욕물 옆에 알파벳으로 ‘Bath Water’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책이냐고 물었습니다. 한 소녀가 “동방신기 아셔요? 그 오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이에요”라면서 동방신기 오빠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런 책들을 ‘팬 북’이라고 한다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인천의 한 중학교 1학년이라는 그 소녀들은 목욕물님의 이번 첫 저서를 받기 위해 인천에서 서울 명동까지 전철을 타고 왔다더군요. 저자인 목욕물님의 ‘친필 사인’을 받고 소녀들은 아주 흐뭇한 표정이었습니다. 책값은 1만 2천원. 700페이지가 넘는 하드 카버 양장본치고는 싼 편이었습니다.
중학생 소녀는 이런 ‘팬 북’을 ‘열권쯤 소장하고’있다고 하더군요. 마침 오늘도 ‘레몬타임스’라는 역시 하드카버 소설책을 들고 왔는데 ‘혀 깨물기’보다 훨씬 더 두꺼웠습니다. 무려 1천 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그 책은 2만원이었습니다.
소녀는 ‘소장본’ 중 한 두어 권은 ‘양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꽃미남 그룹 ‘동방신기’ 오빠들의 열렬한 팬들을 위해 그 오빠들을 등장시켜 ‘장편소설’을 인터넷에 발표한 뒤 팬들의 요청으로 그걸 예쁘고 멋있는 ‘하드카버 양장본’ 책으로 엮어내면 그걸 소장하는 게 소녀들의 요즘 유행인 것 같았습니다.
특히 오빠들에 대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꿰고 있는 ‘광팬’들의 입장에서 활자매체로 만들어진 ‘오빠들의 환상적 이야기’는 소녀 팬들을 매료시키고도 남을 일이겠지요. 오늘 저와 이야기를 나눈 그 소녀들은 몹시 설레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넘 넘 잼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소녀들은 조금은 수줍어하는 듯했습니다.
인천에서 서울 한복판까지 달려온, 아직 앳된 그 소녀들은 저에게 인터넷으로 이 ‘팬 북’에 들어가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고 자리를 떴습니다.
소녀들이 사라진 후 저는 저쪽 ‘메인테이블’에 앉아 ‘팬 사인회’를 계속 열고 있는 ‘목욕물님’에게 다가갔습니다. 그 테이블에는 목욕물님 또래의 친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마치 ‘헤드쿼터’ 역할을 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20대로 보이는 그녀들은 저를 몹시 경계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대강 저의 신분을 밝히고 ‘새로운 문화 트렌드’인 것 같아서 호기심이 인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저자인 ‘목욕물님’은 미술대학을 휴학 중인 20대 초반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그 아가씨는 책 사진을 비롯한 ‘사진 촬영’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래도 저의 질문엔 얌전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답했습니다.
‘목욕물님’의 말에 의하면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인쇄소에 직접 연락해 이렇게 책을 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출판사 몫만큼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 책값을 무척 싸게 책정할 수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주문한정판매’라는 독특한 판매방식이어서 일단 수요자로부터 ‘입금’을 받고 인쇄하는 시스템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라고 합니다. 300부를 찍었다고 합니다. 이번 책이 그녀의 ‘첫 작품’이어선지 몹시 들떠 있는 듯 해 보였습니다.
스스로도 ‘동방신기’의 열혈팬이라고 밝히면서 “좋아하니까 나쁘게 쓸 수가 없지요. 좋게 썼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선 ‘동방신기’ 멤버들의 이름만 빌렸을 뿐 ‘완전한 픽션’이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소설의 내용이나 줄거리에 대해선 말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궁금하면 직접 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였지만 나중에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면서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자를 비롯한 그녀의 친구들 이야기로는 이런 ‘팬 북’을 “음해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건 ‘돈’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고, 아무튼 여러 가지 이유에서 곱지 않은 시선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런 ‘팬 북 현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냐고 했더니 아주 한심해 하는 표정들로 “서태지와 아이들 때”도 있었다고 가르쳐주더군요. 저자에게 이렇게 두꺼운 책을 쓰는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두어 달 걸렸어요 라고 말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그렇게 짧은 시간에 쓰다니 저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좀 거북했지만 ‘이문은 얼마나 났냐’고 물었습니다. 메인테이블에 앉아있던 그 아가씨들은 그야말로 ‘이구동성’으로 ‘이익 같은 건 바라보지 않고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답했습니다. 제 눈엔 굉장히 어려보이는 그 아가씨 들의 진지한 표정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익이 안 남는다는 건’ 장사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관용어지만 이 아가씨들은 단순한 ‘장사꾼’이 아닌 ‘문화사업가’들이기에 그녀들의 태도가 아주 허황되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책의 두께를 감안해볼 때 그녀들 말대로 수익성 높은 사업은 아닌 듯 했습니다. 동방신기 오빠들에 대한 열정 없이는 쉽지 않은 일로 보였습니다.
물론 ‘다소’의 이익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좋아하는 ‘오빠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 같은 팬인 독자들과 ‘공감의 장’을 마련한다는 그 자체가 그녀들에겐 무엇보다도 소중한 일이겠지요.
이 ‘팬북’을 구입하는 팬들의 연령층은 의외로 다양했습니다. 10대 초반 소녀들부터 30대까지 있다고 합니다. 제가 잠시 서 있던 순간에도 여고생차림부터 대학생까지 ‘폭 넓은 팬’들이 책을 받아가는 걸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중학생 소녀들이 가르쳐준 대로 인터넷 서핑을 해봤습니다.
‘동방신기 팬 북 리스트’에 들어갔더니 2004년 7권으로 시작한 ‘팬 북’은 2006년엔 55권 이상이 만들어졌고, 2007년 상반기에만도 80권 가까이 나왔더군요.
제목들 중엔 꽤 ‘성인 문화적’인 것들도 많았습니다.
인터넷에는 오늘 제가 본 ‘목욕물님’의 저서도 ‘입금 받는 중’이라는 안내가 나와 있었습니다. 목욕물님의 홈페이지로 직접 들어갔더니 오늘 ‘혀 깨물기’ 소장본 직배 날이라는 ‘안내문’이 실려 있었습니다.
다른 자료를 뒤져보다가 ‘팬 픽’으로 알려진 이 ‘팬 북’현상이 새로운 ‘인터넷 문학’의 한 흐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놀랐던 건 이 꽃미남 오빠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 ‘팬 픽(fanfic)’은 팬 픽션의 줄임말로 동방신기, 젝스 키스 등 인기그룹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주로 ‘동성애 코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혀 깨물기’라는 생소하면서도 조금은 야한 제목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에 소개된 ‘혀 깨물기’의 본문을 몇 편 읽어봤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소개하기 민망스런 대담하고 당돌한 ‘동성애 장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오후에 만난 저자와 그 친구들이 왠지 무언가를 감추고 싶어 하던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습니다. 아직 20대 초반인 ‘어린 그녀들’의 입장에선 ‘구세대’로 보이는 낯선 사람이 자꾸 꼬치꼬치 감추고 싶은 ‘자신들의 방’을 엿보려 하는 게 싫었던 게지요. 그런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대담한 신세대들도 ‘성문제’에서만은 구세대와 ‘교감’하고 싶지 않은 측면이 있어서일 겁니다. 갑자기 그런 그 아가씨들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걱정스런 부분도 있습니다. 그 앳된 소녀들이나 아가씨들이 이런 ‘왜곡된 동성애 문화’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게 꺼림칙하더군요.
왜 그들은 그렇게 좋아하는 ‘동방신기 오빠들’이 동성애에 빠져드는 그런 내용을 쓰고 또 읽고 있는지요. 이게 전 세계적인 추세라는 기사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왕의 남자’이후 널리 퍼지게 됐다고 합니다. 요즘 최고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쌍화점’도 동성애를 주로 다뤘다는 걸 보면 동성애 코드가 주는 어떤 유혹적인 요소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으로 동성애 코드를 주제로 하는 작품들이 범람하는 건 경계해야한다고 봅니다.
더구나 좋은 문장으로 아름다운 문학세계를 접해야할 어린 학생들이 흥미위주의 보편적이지 않은 ‘동성애의 세계’에 먼저 눈을 뜨게 될 때 그 부작용은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니 좀 걱정스러웠습니다.
일종의 ‘뉴 비즈니스’라고도 할 수 있는 작가와 독자의 ‘직거래 방식’의 책 판매 현장은 신선한 풍경이었습니다. 요새 책값이 예전에 비해 굉장히 비싸진 걸 감안할 때 이렇게 ‘인터넷 문화’를 이용해 저렴한 가격으로 책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면 이것도 하나의 ‘문화적인 혁명’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구나 자신들이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층이 형성된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문화적 트렌드로 꼽을 수 있겠지요.
아무튼 ‘후생이 가외’라는 옛말처럼 앞으로의 신세대들은 자기들만의 ‘신문화’를 창조하며 훨씬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현장’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밀고 나간다지요. 이렇게 해서 인류의 문화는 점점 발전해 나가는 것이겠지요. ‘새로운 문화현장’을 목격하고 나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떠오르는 밤입니다.^^
* 이 글은 제가 예전에 썼던 글을 조금 보강해서 다시 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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