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의 사랑은 괴로워
밀레바는 취리히에 오만 정이 떨어져 더 이상 있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신나는 것도 아니었다. 왜 아니겠는가. 청운의 꿈을 품고 찾아온 이국의 도시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영락없는 슬픈 낙오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예전에 공부 잘하던 자랑스러운 딸은 아니었다.
시험 떨어진 것도 창피한데 임신까지 했으니 아버지 앞에 고개들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고향집은 보수적인 분위기가 아직 남아있는 농촌 지역이어서 시집도 안간 딸이 배부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동네창피였다.
그녀는 임시교사직을 마치고 휴양지에 있는 어머니 곁으로 간 아인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인슈타인이 함께 고향집에 가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린다면 부모의 모든 걱정은 사라질 거라며 간절한 부탁을 담았다. 그러나 이미 냉정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한 아인슈타인은 그녀의 부탁을 거절했다.
언제는 밀레바에게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있는 게 지옥 같다는 편지를 보냈던 우리의 아인슈타인 아니었던가! 이렇게 사랑은 그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들을 비웃는 듯 서서히 변해가게 마련인가보다. 그것이 사랑의 법칙인 것이다.
이제 약자인 밀레바가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동행하기 정 어려우면 아버지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는 약속의 편지라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당신이 어떻게 썼는지 나에게 꼭 한번 보여주세요.” 결국 밀레바는 혼자 터덜터덜 고향집에 내려가 부모 앞에서 초라한 그녀의 ‘현황’을 보고 드렸다. 아인슈타인이 편지를 보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편지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는 그녀를 엄호해줄 결혼 약속 편지는 보내지 않은 듯하다. 아마 그때쯤 아인슈타인의 무의식 속에는 졸업시험에 낙방한 밀레바를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로 삼기엔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현상은 남자라는 존재의 일반적 속성이지 아인슈타인만의 특징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원치 않았던 아기까지 가진 연인이 그의 마음속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건 웬만하면 상상 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아인슈타인이 범부(凡夫)들처럼 속된 심정이 되어 밀레바를 모른 척 했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는 단 한시가 아까운 물리학도였다. 세계를 뒤 흔들 최고의 물리학 이론이 태동단계에 있는 중차대한 순간이었기에 생각의 맥을 끊어놓을 어떤 일상의 잡다함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이 그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동생 마야는 그 무렵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오빠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평소 습관인 ‘멍하니 하늘 보기’의 모습이 속 모르는 타인들에겐 세월을 헛되게 보내는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계속 물리학 이론을 정립하는 기초 작업 단계에 있었기에 침묵 속에 치열한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연인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천재에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요구하는 건 가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일반적인 잣대에 부합하는 생활을 하고 싶겠지만 그들 속에 있는 천재성은 그걸 쉽게 허락하지 않는 법이니까.
천재와의 사랑으로 고통 받고 있던 밀레바는 일단 부모에게 모든 걸 보고했던 것 같다. 그녀의 부모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밝혀지진 않았지만 아마도 우리네 부모들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그나마 신체적 결함이 있는 딸이라 결혼시킬 걱정을 몹시 했었는데 명민한 청년과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딸이 이젠 더 이상 어린 자식이 아니라는 것도 부모의 마음을 약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안도 잠시 그들은 중산층 독일인의 자부심을 많이 갖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부모로부터 ‘편지 폭탄’공세를 받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잖아도 아들이 혼전 부모가 될까봐 노심초사했던 아인슈타인의 모친 파울리네는 밀레바의 임신소식에 격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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