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이 된 아인슈타인
이후 아인슈타인이나 밀레바 모두 아기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항간에선 리제를이 성홍열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멀리 입양 보냈다는 설도 있다. 아직까지 어느 것이 정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후 이 아기에 대한 온갖 루머는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어쨌거나 지금보다 훨씬 도덕적 불문율이 강했을 100년 전 세상에서 혼전 출산한 아기의 존재란 환영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100년 전, 국가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아인슈타인으로서는 선뜻 자신의 딸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노출시킨다는 게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결혼을 확정한 두 사람이 아무리 혼전 출산한 아기일지라도 왜 그런 식으로 지나치게 몸을 사렸는지는 다소 의혹이 생긴다.
한편 아인슈타인 동생 마야는 아라우에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가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해버렸다. 그 소리를 전해들은 마리 빈텔러의 엄마 파울리네 는 즉시 아인슈타인의 모친에게 항의를 곁들인 편지를 보냈다.
파울리네는 아인슈타인이 아라우의 주립학교 시절 마마라고 호칭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지만 그가 자신의 딸을 차버리자 파울리네는 아인슈타인에 대해 분노의 심정을 오래도록 버리지 않았던 듯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마리의 언니 안나 빈텔러도 10년이 넘도록 아인슈타인에 대한 원망을 거둬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을 총애했던 마리의 아버지 빈텔러 씨마저 두고두고 아인슈타인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표출했다. ‘무서운 가족’이다.하지만 딸의 가슴을 피멍들게 만들었던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모친은 답신에서 밀레바가 너무 마음에 안 드는 여성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밀레바를 멀리 쫓아버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러나 편지 말미에 이제는 아인슈타인을 설득할 힘조차 없다고 한탄 겸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슬쩍 흘리고 있었다. 자식을 마음대로 할 부모가 어디 있겠냐는 의미였다.
1902년 2월 아인슈타인은 베른의 옛 시가(市街) 아래쪽인 게레흐티카이츠 가 32번지에 주당 23프랑 하는 방을 얻었다. 그의 월급이 4천 프랑인 것을 감안하면 그리 호화스런 규모는 아닌 듯하다. 그는 방에 있는 침대를 비롯한 모든 물건들을 세밀하게 그려서 밀레바에게 보냈다.
그는 아주 쾌적한 방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방이 커서 이곳에서 모임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바로 얼마 뒤부터 이 방에선 아인슈타인이 늙어서까지 자랑스럽게 그리워하는 작은 모임이 시작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자랑스러워하는 이 새 숙소의 첫 방문자는 공교롭게도 뮌헨 김나지움 시절 아인슈타인의 대학생 멘토였던 막스 탈무트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이 기거하는 ‘쾌적한 방’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눈에는 형편없는 가구들이 들어찬 허름한 방에 살고 있는 아인슈타인을 보고 밀라노에 있는 그의 부모가 왜 한숨을 내쉬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탈무트는 어엿한 의사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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