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과 올림피아 아카데미 '도원결의'
아직 출근 전이라 용돈이 궁했던 아인슈타인은 베른신문에 수학· 물리 개인교습 광고를 냈다. 이 광고 문구에도 패기만만했던 그의 자의식 과잉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얼마 후에 아이작 뉴턴 이래로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가 될 사람이 무료로 시범교습을 합니다. 아인슈타인의 완벽한 지도를 받을 연구생이나 학생을 모집합니다.>
이런 광고를 낸 지 며칠 후 두 명의 고객이 찾아왔다. 기사 한명과 건축가 한명이 시간당 2프랑을 지불하고 우주의 신비와 그리고 원자와 열과 에테르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개인교습이란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길 싫어했지만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하고 있는 개인교습이 시간낭비라면서 차라리 거리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며 한탄했다. 그의 이런 심정은 아르바이트로 학생들을 가르쳐본 사람들이라면 아마 100% 공감할 이야기일 것이다.
2개월 후 다시 모집한 수강생 중에 처음으로 등록한 사람은 루마니아 출신으로 베른대학에 다니고 있는 모리스 졸로비네(Maurice Solovine)였다. 그는 아주 활동적인 학생으로 우연히 광고를 보고 들렀다. 부유층 자제인 졸로비네는 끊임없는 학구열에 불타는 학생이었다.
그는 처음 아인슈타인을 보고 ‘특이한 빛을 발산하는 커다란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헌칠한 외모의 졸로비네는 자신이 무슨 공부를 해야할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의 ‘학문적 편력’을 두 시간 넘게 털어 놓았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지나온 이야기를 듣고 즉시 의기투합했다. 자신과 매우 비슷한 그의 지난날 이야기를 듣고 졸로비네에게 돈을 청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앞으로 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대화를 나눌 진정한 친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날로 두 젊은 남자는 친구가 되었고 그 우정은 평생을 갔다.
두 사람의 모임에 샤프하우젠 시절 알게 된 콘라트 하비히트(Conrad Habicht)가 합세했다. 아인슈타인과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올림피아 아카데미’로 명명했다. 그들은 주 1회 모임을 갖기로 합의했다. 그야말로 ‘도원결의’인 셈이다.
20대 청년들의 이 팔팔한 모임은 그들이 70객이 되어서도 서로의 생일을 챙기는 감동적인 만남을 지속한다. 아인슈타인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올림피아 아카데미’야말로 세계 어떤 학술모임보다 수준 높은 모임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만들었던 올림피아아카데미는 내가 나중에 알게 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카데미들에 비하면 덜 유치한 편이었죠.”
사실 무명의 예비 학자들이 일종의 토론 모임을 가지면서‘올림피아 아카데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던 건 권위주의적인 학술모임 쪽에서 보면 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세기의 석학’반열에 들어선 아인슈타인의 ‘무명시절’ 모임이라는 점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을 만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식으로 학회에 가입하지 않았던 아인슈타인에게 이 아카데미는 비록 3인의 소규모 독서토론 모임이었지만 아인슈타인에게 신선한 지적 자극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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