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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35- 4세 연상신부 맞은 아인슈타인 "의무감으로 한 결혼이었다"

스카이뷰2 2009. 4. 4. 18:55

 

 

  4세 연상신부 맞은 아인슈타인 "의무감으로 한 결혼이었다"

 

 

문제는 밀레바였다. 그녀나 아인슈타인이나 왠지 시들해져 서로에게 감정노출을 자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밀레바는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한창 사랑을 쏟아 키워야할 아기를 머나먼 곳에 남겨두고 왔으니 그 애틋한 모정은 오죽했겠는가. 그래도 아인슈타인이 있는 베른으로 오자 조금 위로를 받는 듯 했다.

 

그러나 이번엔 아인슈타인이 문제였다. 그는 외로운 밀레바를 돌보는데 조금은 소홀한 태도였다. 그러니 밀레바는 섭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친구들은 그 둘 사이에 틈새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였다. 친구들이 밀레바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가 물었지만 밀레바는 그냥 개인적인 일이라며 입을 닫아버렸다. 

 

밀고 당기는 연인들 사이의 실랑이 끝에 부친에게서 결혼 허락을 받은  몇 달 뒤 드디어 두 연인은 결혼식을 올렸다. 1903년 1월 6일 베른의 등기사무소에서 28세의 신부 밀레바와 24세의 신랑 아인슈타인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양가 가족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다.

 

‘도원의 결의’맺었던 올림피아 아카데미의 친구들 졸로비네와 하비히트가 결혼식 하객 겸 증인으로 그들의 결혼을 지켜봤다. 신혼여행은 갈 형편이 아니었다. 이미 코모 호수로 예비 허니문을 다녀온 그들이다. 더구나 혼전 출산한 딸 리제를의 문제로 여전히 두 사람사이에는 감정의 앙금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명색이 결혼식인데 그냥 넘어가는 건 섭섭했는지 두 사람과 친구들은 카페에서 축하파티를 열었다. 단출한 파티였지만 두 사람은 다른 어느 때보다 모처럼 오붓한 행복감을 느꼈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그들은 강바람을 맞으며 새 보금자리인 아파트까지 걸어갔다. 집문 앞에 도착해서야 아인슈타인은 열쇠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았다. 늦은 밤 시간이었지만 할 수 없이 집 주인의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대야 했다.  

 

신랑이 아파트 열쇠를 잃어버려 결혼 첫 날부터 소동을 벌인 것은 그들 앞의 결혼 생활에 어두운 상징처럼 드리워졌다. 그렇지 않은가. 왠지 결혼 생활을 지켜주는 행운의 열쇠 같은 이미지도 느껴지는 아파트 열쇠를 분실했다는 건 그들의 순탄치 못할 앞날을 예고하는 한 사인(sign)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겨울 강바람 탓인지 두 사람 모두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그래도 신혼인지라 둘은 한껏 들뜬 기분이었나 보다. 아인슈타인은 이탈리아에 있는 친구 베소에게 자신의 행복한 기분을 적어 보냈다. “이제 아내와 아주 즐겁고 아늑하게 지내고 있네. 아내는 못하는 일이 없네. 요리도 잘 하고 늘 명랑해.” 밀레바도 헬레네에게 신혼을 자랑하는 편지를 썼다. “그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료야. 취리히 시절보다 훨씬 더 많은 애정이 느껴져. 난생 처음 행복감을 느끼고 있어.”       

 

누군가가 그랬지. 죽기 전에는 행복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문득 그 섬뜩한 경구가 이들 신혼부부의 편지를 보면서 생각난다. 이 신혼부부 앞에는 이제 파란만장한 풍파가 다가오고 있었다. 연애시절에도 그렇게 평탄한 세월은 아니었지만 ‘쓰디쓴’ 결혼생활을  통과하면서 그들 부부는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걸 뼈저리게 맛보게 된다.

 

그야말로 결혼이란 ‘아름다운 오해에서 시작해 참담한 이해로 막을 내린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들은 서로를 순간순간 교차되는 감정의 불연속선 탓에 미워하고 사랑하고 또 미워하다가 결국은 파탄에 이르러 ‘불행한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만다.

 

아인슈타인은 노년에 들어 20대 시절의 첫 결혼을 회상하면서 ‘마지못해 했던 결혼’이라고 말했다. 오! 맙소사. “밀레바와의 결혼은 내심 거부감을 느꼈다. 의무감으로 한 결혼이었다.”이러니 못 믿을 건 ‘남자의 마음’이고, ‘짧았던 신혼의 행복’은  착각이었다. 그들이 ‘행복한 결혼생활에 올인’하기에는 첫 딸의 양육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걸림돌이 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