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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이야기34>기술직 3급공무원으로 첫출근한 아인슈타인

스카이뷰2 2009. 4. 1. 00:07

 

 

  기술직 3급공무원으로 첫출근한 아인슈타인

 

1902년 첫 모임을 가질 무렵 그들은 모두 자존심 강한 명석한 청년들이어서 금세 화기애애한 가운데 학문적 대화는 물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들을 밤새워 나눴다. 저녁식사는 대체로 볼로냐 소시지, 그루이어 치즈, 과일 몇 조각 꿀, 차 한 두잔으로 아주 소박한 식탁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술을 입에대지 않았기에 친구들도 그와 함께 차나 마시며 담소했다. 졸로비네는 훗날 당시를 회상하면서 ‘행복한 가난,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그들은 생물학자 칼 피어슨의 ‘과학의 문법’, 존 스튜어트 밀의 ‘논리의 체계’,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인간 본성에 관한 고찰’,플라톤의 ‘대화’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철학책들과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읽고 토론했다.

 

유서 깊은 유럽의 도시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돌들이 박힌 베른의 거리는 도시의 역사적 품격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베른은 취리히에서 생활할 때와 거의 비슷해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라고 썼다.

 

도시의 전체 분위기는 중세의 아늑함을 간직하고 있어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좋아하는 아인슈타인의 마음에 들었다. 도심에서도 멀리 알프스의 눈 덮인 산봉우리들을 볼 수도 있어 매력적인 도시의 풍광을 갖췄다. ‘자연과 문화’가 적절히 어우러진 세련된 도시였다.

 

아인슈타인은 특히 덮개시설이 되어있는 화려한 아케이드를 걸어 다닐 수 있어 쾌적하다는 이야기를 밀레바에게 들려주었다. 비가와도 걱정 없이 아케이드의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어슬렁거릴 수 있다는 점이 아인슈타인에겐 썩 괜찮은 인상을 준듯하다.

 

1902년 6월16일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기술직 3급 공무원의 신분으로 특허국에 첫 출근했다. 특허국은 기차역에서 북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슈파이어 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국가기관답게 권위 있게 보이는 하얀 석회석 건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정식 직장 외에도 박사 논문 마무리 작업과 올림피아 아카데미 활동 등으로 바쁘면서도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기분이 아주 좋고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내가 고민하고 걱정하던 것들이 다 해결되었거든.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셔서 그게 제일 큰 걱정이야.”

아인슈타인은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밀라노로 급히 떠났다.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아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1902년 10월10일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제대로 아버지를 보살펴드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한동안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단 아인슈타인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세상 어느 자식이든 부모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불효자였나에 가슴을 치는 게 바로 인생살이인 것이다.

 

좋았던 기억보다는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일들만 떠오르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밀레바 문제로 상당 기간 부모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임종직전의 아버지로부터 결혼허락을 받았기에 그나마 다행인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