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단골 카페가 있던 베른의 풍경.(다음 뉴스사진)
아내보다 카페를 더 좋아했던 '카페 맨' 아인슈타인
사네 못 사네 우여곡절 속에서도 1910년 7월 28일 밀레바는 두 번째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에두아르트였지만 집에서는 테테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테테는 병약하지만 아주 총명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였다. 재주가 많은 미소년으로 자라는 아이를 보는 것은 부부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이 아이 앞에 펼쳐질 비극적 운명으로 인해 아인슈타인 부부는 그들이 죽을 때까지 자식걱정을 하며 살아가야 했다. 오죽하면 무자식 상팔자라는 옛말이 바로 이들 부부에게 해당될 줄은 이 젊은 부부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초보 교수들이 그렇듯이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명강사로 자리 잡기까지 아인슈타인은 강의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 집에 돌아와서도 종종 밀레바가 지켜보는 가운데 밤늦게까지 강의준비에 몰두했다. 그때 아마 밀레바의 가슴 한 구석엔 이런 심리도 있었을 것이다.
“아 나도 강의준비해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밀레바는 아인슈타인과 헤어지기 전까지 아니 헤어지고 나서도 그의 학문적 성취에 질투와 선망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학문의 길에서 내가 차지해야할 영광의 성취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는 심정은 학자적 마인드를 버리지 못한 그녀로선 지워낼 수 없는 상처였던 것이다.
학생들은 새로운 스타일의 아인슈타인의 강의 형식에 솔깃했다. 아인슈타인은 예전 올림피아 아카데미 시절처럼 학생들에게 프리 토킹 식으로 강의 도중 무슨 질문이든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는 학생들을 공동연구자나 동료처럼 대했다. 교수들의 권위의식이 하늘을 찌르던 당시로서는 아주 보기 드문 소탈한 강의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나랑 카페 갈 사람?”을 후렴구로 사용할 정도였다. 권위주의 스타일의 다른 교수에 비해 학생들은 신선한 강의 스타일의 아인슈타인을 많이 따랐다. 학생들은 강의가 끝나면 그를 따라 테라세 카페로 갔다.
그들의 대화는 카페가 문 닫는 순간까지 계속될 정도로 열띤 토론이 끊이질 않았다. 꼭 학문적 내용만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은 사사로운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털어놓듯 학생들에게 격의없이 말했다. 당시로선 퍽 파격적인 교수였다.
카페를 자신의 연구실이자 응접실로 애용하던 젊은 아인슈타인 교수에 대한 학생들의 인기는 대단했다. 워낙 밀라노에서 지낸 소년시절부터 카페를 드나든 ‘카페 맨’ 아인슈타인은 답답한 아파트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밀레바 보다는 카페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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