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모임'에서 독보적 인기 누린 아인슈타인
프라하로 이사 온 후 밀레바는 더 말이 없어졌다. 우울증이 깊어진 것이다.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국에서 병치레가 심한 어린 아기와 점점 말썽꾸러기 소년으로 자라고 있는 큰 아들을 기르는 것도 버거웠다.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쓴 적이 있던 필립 프랑크는 그 무렵 밀레바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도 그녀가 정신적 분열증을 앓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야비하진 않지만 의심이 많고 무뚝뚝하고 우울해했다”
게다가 다리를 저는 신체적 장애도 그녀의 내면에 씻을 수 없는 콤플렉스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요는 아인슈타인에 대한 애정을 갈구했지만 사랑받지 못했다는 외부적 요인과 함께 밀레바의 내면적 요인이 그녀를 이중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는 얘기다.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여류명사 베르타 판타가 주선하는 유명한 ‘밤의 모임’에 종종 참석했다. 이 모임에는 프란츠 카프카와 막스 브로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브로트는 아인슈타인을 모델로 ‘티코 브라헤의 대속’이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도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 연주솜씨는 독보적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런 사교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면서도 프라하에서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고립감을 느꼈다.
이렇게 불만스러운 프라하의 생활은 다행히도 빨리 막을 내리게 되었다.
1912년 2월 스위스 정부는 아인슈타인에게 프라하에서 받는 연봉보다 1천 프랑을 더 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이례적인 대우였다. 그는 스위스로 다시 돌아간다는 기쁜 소식을 취리히에 있는 친구 부부에게 알렸다.
“이틀 전에 이곳 대학에 정중한 사임편지를 보냈지. 우리 두 늙은이와 두 마리 새끼 곰들은 아주 기뻐하고 있다네.” 이제 겨우 33세 된 신진 학자가 자신과 아내를 두 늙은이로 호칭한 대목이 우습다. 그만큼 오래 산 것 같은 지긋지긋한 기분이 들었다는 얘기일까? 아무튼 그들 가족은 이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스위스 취리히로 갈 수 있게 된 것에 대만족이었다.
프라하 대학에서 보낸 가을 학기에 아인슈타인은 세계적인 과학자 모임에 참석했다. 24명의 참석자중 3분의 1 가량이 노벨상을 받았거나 수년 내에 받을 사람들로 그만큼 쟁쟁한 엘리트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1911년 10월 29일 벨기에 메트로폴레 호텔에서 개최된 제1회 솔베이학회였다.
이 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이 가장 존경하는 로렌츠 박사가 의장을 맡아 그의 타고난 재치와 해박한 과학적 통찰력으로 토론회를 이끌었다.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어학실력도 겸비한 그로서는 첫 모임의 좌장 역할을 맡게 된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오죽하면 오만한 아인슈타인의 입에서 ‘살아있는 예술품’이라는 찬사가 나왔을까.
아인슈타인은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모든 주제들이 진부하다는 걸 금세 느끼고 실망했다. 그래도 휴식시간에는 오히려 상대성 이론에 관한 화제가 만발한 것이 조금 그를 안심시켰다. 그때 벌써 아인슈타인의 이론 체계는 최첨단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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