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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50>스캔들에 휘말린 퀴리부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변명

스카이뷰2 2009. 7. 27. 08:22

 

                              퀴리부인의 모교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 전경.(다음 자료사진.)

  

    스캔들에 휘말린 퀴리부인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변명

 

이 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은 프랑스대표로 온 퀴리, 랑주뱅, 페랭 같은 신예 학자들과 더 잘 어울렸다.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입증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기에 아주 친한 친구들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특히 랑주뱅에게 매료되었다. 그는 자기가 상대성이론을 만들지 않았으면 랑주뱅이 이루어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랑주뱅은 학회 도중 함께 온 마담 퀴리와의 스캔들에 휘말리는 바람에 당시 매스컴의 조명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마담 퀴리는 그녀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던 남편 피에르가 1906년 마차에 치여 죽는 바람에 5년째 홀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노벨상을 받은 이래 유럽 전체에서 최고의 여성 과학자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입회하려는 그녀를 기존의 남성회원들은 단번에 거부했다. 아카데미회원이 되려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녀는 겸손치 못하고 여성답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100년 전 이야기다. 그런 마당에 랑주뱅과의 스캔들이 터져 나왔으니 훨훨 타고 있는 불판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랑주뱅은 원래 마담 퀴리의 남편의 제자였다. 섬약한  그는 극성스런 아내에게서‘학대받는 남편’이었다. 철제의자로 얻어맞아 상처투성이가 되어 연구실에 나타나는 바람에 주변 사람을 놀라게 한 일도 있다. 그야말로 엄처시하에서 공처가로 살던 소심한 과학자였다.

 

스승인 피에르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크게 상심하고 있던 사모님인 마담 퀴리의 곁을 랑주뱅이 지켜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뒤늦게 사랑에 불이 붙은 이들은 소르본 근처에 밀회의 장소까지 마련했다.

 

랑주뱅의 극성쟁이 아내는 이 소식을 알자 마담 퀴리를 죽이겠다고 여러 차례 협박했지만 ‘결정적 단서’는 잡지 못하고 그들이 교환한 연애편지를 ‘물증’으로 기자에게 전했다. 바로 솔베이의 학회가 열리는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참 파란만장한 마담 퀴리다. 매스컴에선 연애편지 전문을 공개하는 인권침해적인 보도를 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실을 알자 마담 퀴리를 적극 두둔하고 나섰다. 그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도 의심스럽지만 그들이 사랑의 도피를 위해 브뤼셀 학회에 참석했다는 건 어불 성설이라며 남의 일에 목청을 높였다. 물론 그들에 대한 우정에서였겠지만. 여기에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던 아인슈타인이 ‘동병상련’의 아픔을 갖고 퀴리와 랑주뱅을 두둔했던 것도 그의 속마음 한편에는 숨어있었을 것이다.

 

더 재미있는 건 아인슈타인이 마담 퀴리를 옹호하려고 한 발언의 내용이다. 물론 퀴리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탓도 있었겠지만 그는 “마담 퀴리는 누군가를 유혹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번득이는 지성과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에게 위험이 될 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는 말까지 했다. 아예 '여자'로 치지 않는다는 얘기로 그녀의 결백함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