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추천사를 써준 마담퀴리
어쩌면 아인슈타인의 솔직하고 거칠 것 없는 화법에서 나온 자연스런 말이었겠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여성’으로서의 마담 퀴리에겐 굴욕적인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는 또 “퀴리 부인은 매우 똑똑하지만 청어처럼 차갑소. 그녀에게는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들이 거의 없소.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은 훨씬 더 지독하다오. 마치 대구 같소, 하지만 딸도 대단히 총명하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쯤 되면 아인슈타인과 ‘여성’인 마담 퀴리가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우정을 지속해나갈 수 있었던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솔베이 학회 도중 퀴리는 또다시 노벨 화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녀에게 시상식에 오지말라고 했다. 랑주뱅 문제가 해결된 다음에 시상식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기발한 제안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퀴리는 노벨상은 자신의 학문적 성취에 대한 것이지 사적인 문제에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당찬 대답을 하며 스톡홀름의 시상식장에 가겠노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역시 당당한 마담 퀴리다.
21세기의 시점에서야 이런 개인적인 문제를 이유로 저명한 학자에게 그 같은 ‘망언’이야 하지 않았겠지만 100년 전 세상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마담 퀴리는 노벨 물리학상에 이어 화학상까지 받아 여성과학자로는 드물게 물리와 화학 분야의 노벨상을 석권했다. 남성과학자들도 한 사람이 두 번씩이나 노벨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세상의 비난에서 자신을 지켜준 12세 연하의 젊은 아인슈타인에 대해 마담 퀴리도 아인슈타인에 대한 추천의 글을 썼다.
“나는 아인슈타인 씨가 현대 이론 물리학의 의문들에 관해 발표한 연구논문들에 깊이 감탄했습니다. 나는 브뤼셀에서 열린 과학회의에 아인슈타인 씨와 함께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명석함과 여유 있는 유머와 박식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그가 아직 젊다는 것을 감안해 보면 그가 미래에 최고의 이론가가 될 것으로 믿습니다.”
역시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가보다. 마담 퀴리가 이 글을 쓴 꼭 10년 뒤 아인슈타인은 드디어 노벨 물리학상을 타게 된다.
아인슈타인과 마담 퀴리는 가족들끼리도 친밀하게 지냈다. 마담 퀴리의 두 딸을 데리고 스위스 산악지대를 도보로 여행하기도 했으며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마담 퀴리는 오랜 연구생활로 방사선에 과다노출되는 바람에 67세를 일기로 1934년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아인슈타인은 뉴욕에 세워진 퀴리 추모관에 이런 추모사를 썼다.
“20년 동안 퀴리부인을 알고 지내며 우정을 나눠온 것은 내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강인함과 순수한 의지, 절제와 객관적 합리성, 공정한 판단력 이 모든 것들을 한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두 탁월한 남녀 과학자의 나이를 초월한 지상에서의 우정은 그렇게 끝났지만 퀴리는 아인슈타인이 존경하는 거의 유일한 여성과학자였다. 자의식이 강한 이‘천재 과학자’는 누구를 쉽게 존경하는 버릇은 갖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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