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파스쿠찌가 있었던 명동빌딩. 왼쪽에 내가 좋아하는 느티나무가 살짝 보인다.(조선일보사진)
7월10일 개장한 명동 영풍문고 내부. 도서관처럼 책상과 의자도 몇개 있어 아늑하다.
사라진 ‘한국 최고 땅값’ 명동 파스쿠찌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다
어제 오랜만에 명동에 나갔다가 길을 잃은 줄 알고 잠시 당황했다.
명동이라면 언젠가 우리 블로그에 ‘명동의 재발견http://blog.daum.net/skyview999/10838579 ’이란 글도 올렸듯이 거의 ‘고향’같은 동네인데 잠시라도 길을 잃었다는 착각에 빠졌던 건 예삿일이 아니다. 한 달 정도 안 간 사이에 그만큼 변해있었다.
명동에 나가면 늘 드나들어 정들었던 카페 파스쿠찌가 사라진 것이다. 사보이 호텔 쪽에서 몇 걸음만 떼면 닿는 곳이어서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던 건물을 찾느라 거짓말처럼 갈팡질팡한 것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파스쿠찌가 있던 건물은 리모델링 공사 중이었다.
명동은 여전히 북새통인데다 땅을 온통 파헤쳐놓은 도로공사가 한창이어서 짜증나고 혼란스러운 거리로 변해 있었다. 무더운 날씨를 피할 겸 들어가려했던 카페마저 사라져버려 순간적으로 황당해진 것이다.
안내문을 보니 7월 1일부로 사라진 파스쿠찌 대신 무슨 화장품점이 들어서 인테리어 공사를 한창 하는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 아침 신문에 ‘한국최고 땅값 명동빌딩의 저주?’라는 제목으로 파스쿠찌가 들어섰던 명동빌딩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 따르면 그 빌딩은 평당 2억 599만원으로 현재 대한민국에선 제일 땅값이 비싼 곳이다. 250평으로 5층인 이 빌딩은 1999년 세워졌고, 2000년 스타벅스가 들어섰다. 스타벅스 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부지런히 이곳을 드나들었으니 어언 10년 세월이 흐른 셈이다.
월세가 하도 비싸 스타벅스가 5년 만에 두 손 들고 나간 자리에 바로 파스쿠찌가 들어섰다. 보증금 30억, 월세 1억원에 3년간 지내다가 작년부터 월세가 1억 1500만원이 됐다.
그러니 한잔에 4천원 하는 커피를 몇 잔 팔아야 월세를 낼 수 있는지 계산기를 한참 두드려야 할 것 같다. 그래도 5년 정도 커피 팔아 그럭저럭 ‘유지’해 온 것은 보통일이 아닌 듯하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파스쿠찌 본사에서 ‘이미지 관리’를 위해 ‘적자’를 메워줬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비싼 월세와 인건비를 어떻게 단순히 커피 몇 잔 팔아서 해결할 수 있겠는가.
내가 명동 파스쿠찌를 애용해 온 것은 그곳 2층 통유리창밖 가득 보이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주는 풍치가 맘에 들어서였다.
나무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느티나무는 무슨 오래된 벗처럼 늘 사람을 위로해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이 단순해선지 마음이 심란해질 땐 느티나무를 그저 바라만 봐도 금세 치유되곤 한다. 느티나무는 나무자체의 스타일도 멋있지만 그 이미지가 내게 늘 정겹게 다가온다. 아마도 어린 시절 재미나게 읽었던 강신재의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추억이 변형돼 그런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워낙 느티나무 자체가 수려한 외모의 미인 같이 아름다운 존재여서 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만 느티나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한결같이 느티나무 팬들이다. 우스갯소리로 나중에 할 일 없으면 ‘느티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을 하나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들도 나누고 있을 정도로 느티나무에 대한 ‘애정’은 대단하다.
어쨌거나 빌딩이 숲을 이룬 명동이라는 번화한 거리에서 창밖으로 풍성한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명동 파스쿠찌는 내가 선정한 ‘최고의 카페 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명동에 가면 어김없이 ‘출석’하곤 했던 것이다.
파스쿠찌 2층에 올라가 세 번째 테이블에 앉으면 커다란 통유리 벽 바로 옆 으로 위풍당당 올라와있는 풍성한 느티나무가 그렇게도 든든할 수가 없었다. 말을 안 해도 서로 좋아한다는 것을 느끼는 ‘연인’처럼 나와 느티나무는 무언의 교감을 나누곤 했다.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보면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만큼 나에겐 ‘명당자리’여서 어떨 때는 슬며시 불안해졌다. 특히 손님이 별로 없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땅값’이 비싼 곳이라는데 이렇게 장사가 안 되면 어떡하나...주인도 아니면서 거의 ‘주인정신’으로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사랑하는 연인이 사라져버릴 것 같은 그런 애절한 마음이었다고나 할까. 그만큼 파스쿠찌의 느티나무는 연인 같은 존재였다.
파스쿠찌가 사라졌다는 걸 안 그 순간 기운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후텁지근한 날씨 탓에 짜증마저 났다. 서운한 마음에 울컥해지기까지 했다.
슬픈 기분이 되어 롯데백화점 쪽으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 한 안경 낀 청년이 내게 볼펜 한 자루를 ‘사은품’이라 주면서 “영풍문고가 이 건물 지하 2층에 오늘 개점했습니다. 한번 들어가 보세요”라고 말했다.
‘책방’은 평소 내가 원기를 수혈 받는 곳 중에 한 곳이어서 ‘영풍문고’라는 소리를 들으니 귀가 번쩍했다. 철없는 나는 좀 전까지 심란해졌던 마음을 금세 던져버리고 청년이 가리키는 건물로 들어갔다.
에스컬레이터로 지하 2층에 도착하는 순간 거의 뭉클해진 심정이 되었다. 꽤 아담하고 예쁜 새 ‘책방’이 나를 안아주기라도 하려는 듯 거기 그렇게 서 있었던 것이다. 도시인의 지친 영혼을 위로해주는 듯한 힘마저 느껴지는 그런 아늑함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새로 들어선 책방은 연전에 장사가 안 돼 문을 닫아 나를 안타깝게 했던 샘터 책방이 있던 자리였다. 아마 서점가에선 그래도 ‘대기업’축에 속한다는 ‘영풍문고’가 인수해 새 단장을 했나보다.
어쨌거나 그렇게 해서 사라진 파스쿠찌 탓에 심란해졌던 내 마음은 캄파 주사를 맞은 듯 금세 원기를 회복했다. 그야말로 무슨 소설문장처럼 ‘하나를 잃고 하나를 얻다’의 시추에이션이 내게 펼쳐진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나는 예쁜 책방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감을 천천히 음미하며 앞으로 나의 ‘명동 안식처’는 이곳이 될 거라는 강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마음속에 따스한 등불 하나가 켜지는 순간이었다.
새 책방이 더 좋은 것은 유리벽으로 환히 올려다 보이는 위층에 아이스크림 가게와 카페, 그리고 싱가포르 직수입이라는 처음 본 빵가게가 책방을 에워싸듯 들어서 있다는 점이다. 책방의 인근주변 환경이 이 정도면 장사도 웬만큼은 될 것 같다. 이제 이 곳은 새로운 ‘명동의 정신적 마스코트’ 로 명동의 문화적 터전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
파스쿠찌가 사라져 꽤나 아쉬웠지만 더 좋은 문화적 업소가 들어서 다소 안심이 된다.
책방은 삭막한 도시에 문화적 활력을 주는 매력적인 장소다. 앞으로 명동의 이 책방은 명동을 찾는 젊은이들의 '브레인 지킴이'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낼 거라고 본다.
이렇게 어제 하루 동안 나는 명동이 주는 새로운 활기를 맛보며 ‘명동의 재발견’에 젊은 기운을 얻고 뿌듯해진 마음으로 혼자 웃었다. 한 20년은 젊어진 것 같다. 브라보 마이 명동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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