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전8기끝에 마침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아인슈타인
어쨌든 그들의 이혼 3년 후, 1922년 아인슈타인은 대망의 노벨상을 타게 되었고 약속한 대로 상금은 밀레바가 가졌다. 물론 현금이 그녀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니고 일단 은행에 예치해 놓고 매달 이자만 그녀와 아들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큰아들 한스는 이 조치에 대해 아버지에게 불만이 많았다.
아인슈타인은 친구에게 “한스가 노벨상 상금 처리 때문에 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불쾌하고 거만한 편지를 보내왔네”라며 우울해 했다.그 이후로도 이들 부자는 화해와 갈등을 되풀이했다.
주요인은 동생을 돌보는 정신적 재정적 어려움 탓이었다. 한스는 밀레바와 자식들의 생활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데 격한 비난의 편지를 보내곤 했다.
아인슈타인은 두 아들에 대해 아버지로서의 애틋한 정을 느끼긴 했어도 그 표현방법에서는 다소 미숙했다. 더군다나 밀레바와 별거하면서는 늘 아들들이 자신에게 버릇없이 구는 것이 밀레바 탓이라고 불평하곤 했다. 제 눈에 들보는 안 보이고 남의 눈에 티끌은 크게 보인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사실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은 8번째 도전끝에 타게된 것이다. 말 그대로 7전8기라고나할까.
그때까지 아인슈타인은 거의 해마다 8년 연속 노벨 물리학상 후보로 거명되어왔으나 왠지 번번이 마지막에 탈락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 유대주의자인 독일의 물리학자 필립 레나르트가 노벨상 선정위원회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방해하였던 것이다.
레나르트 자신은 1905년 음극선 연구로 이미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던 사람이다. 더구나 그는 밀레바가 학생 시절 잠시 독일로 건너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그의 강의를 들었던 인연이 있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전후로 아인슈타인은 평화주의자로서 반독일 적인 발언을 많이 하곤 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자 독일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나치는 <아인슈타인에 반대하는 100명의 저자들>이라는 책까지 출간할 정도로 아인슈타인의 노벨상 수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왜 하필 100명인가 내 이론의 잘못을 지적하려면 한 사람이면 충분한데”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에게 노벨상을 주는 게 자꾸 늦어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상대론이 너무 어려워 선정위원들도 그 이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강력히 나돌았다. 만약 나중에 상대성 이론이 틀렸다고 판명된다면 선정위원회의 권위가 추락할 것이라는 염려 탓에 과감히 상을 주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수많은 뜻있는 과학자들이 “지금부터 50년 후 수상자 명단에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실려 있지 않다면 후세 사람들은 우리를 얼마나 비웃을까”라며 노벨상 위원회에 강력 추천의 편지를 보냈다. 세상엔 악인들의 숫자만큼 선인들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다보니 선정위원회는 ‘상대론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론물리학의 모든 연구, 특히 광전 효과 법칙의 발견’에 대해 수상하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상대론에 대한 회의론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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