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반대 무릅쓰고 결혼한 아인슈타인 장남의 부전자전
한스는 장남이어선지 어린 나이 때부터 ‘아버지의 빈자리’를 자신이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조숙한 아이였다. 동생에겐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태도로 대했다. 애늙은이 모습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수많은 갈등을 겪었지만 대학은 결국 아버지의 모교인 스위스 공과대학에서 토목 공학을 전공했다. 1936년에는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1927년 한스는 결혼문제로 아버지와 크게 다퉜다. 마치 30년 전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결혼문제로 부모의 속을 썩게 했던 것과 꼭 같은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어머니가 밀레바와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심하게 아들의 결혼을 만류했다. 그는 며느리감에 대해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삼으려하는 교활한 여성이라며 비난했다. 아인슈타인은 심지어 신부의 가계에 특이한 병력이 있는지 뒷조사마저 시킬 정도였다.
한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보다 무려 9세 연상의 멕시코 계 이웃 처녀 프리다 크네히트와 결혼을 강행했다. 아인슈타인이 아들의 결혼을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신붓감이 아들에 비해 너무 늙었고 신장이 140 센티 정도여서 왜소증 유전인자가 있을 것을 걱정한 데 있다.
아인슈타인의 모친이 밀레바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크게 걱정했고 세르비아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유전적 질병을 걱정했던 것과 너무도 흡사한 이유였다. 아인슈타인은 한스에게 정 결혼한다면 아이는 갖지 말 것을 당부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와는 달리 프리다가 죽을 때까지 30여년을 그녀와 해로했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은 나중에 첫 손자를 꽤 귀여워해 자신이 아끼던 바이올린 ‘리나’를 손주에게 넘겨주었다.
1919년 밀레바는 이혼 당시만 해도 일단 경제적으로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인슈타인의 나이 40대 초반부터 그에게 찾아온 세계적 명성과 화려한 사회적 지위의 혜택은 보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를 받으며 공연장을 찾거나 미국을 비롯한 해외 각지를 강연 겸 여행 다닐 때, 동반자로서 누리는 ‘사회 문화적 권세’는 그녀가 이혼한 후 4개월 만에 아인슈타인의 아내 자리를 차지한 엘자에게 고스란히 양보해야 했다.
그렇기에 밀레바는 독일의 한 신문이 아인슈타인과 엘자 그리고 그녀의 두 딸이 함께 찍은 사진을 실으면서 '아인슈타인의 딸들’이라는 캡션을 달자 격노해 즉시 아인슈타인에게 항의를 했다. 물론 ‘친자’인 한스 역시 어머니를 거들어 함께 소란을 피웠다. 객관적으로 보면 재혼해서 얻은 딸도 딸인데도 그걸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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