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7년 3월 서울에 온 우루과이 대표팀과의 경기를 보고 제가 썼던 글입니다.
'다시 보는' 우루과이가 축구를 잘하는 진짜 이유
-대한민국과 우루과이 축구 평가전을 보고-
조금 전 서울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우리나라와 우루과이와의 축구경기는 우리가 아쉽게도 0대 2로 졌습니다.
그냥 친선경기니까 뭐 그렇게 승패에 연연해하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시합이니까 일단 이기고 보는 게 좋은데 하는 아쉬운 마음은 좀 들더군요.
우루과이와의 경기에 대해선 축구 전문가가 아니니까 정확한 관전평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단지 이 경기를 둘러싼 이러저런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어제(24일) 아침 KBS뉴스를 통해 우루과이와 시합이 있다는 걸 알았는데요, 어느 방송에서 중계한다는 안내는 하질 않더군요. 제일 중요한 정보를 안 전하는 걸 보고 KBS가 아닌 MBC나 SBS에서 할 것이라는 걸 눈치 챘습니다. 좀 야박스럽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물론 자기 방송사에서 중계하지 않고 타 방송사에서 한다면 그것까지 방송해줄 필요야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그래도 자기네 방송사의 뉴스를 보는 시청자들을 위해 ‘팬 서비스 차원’에서 좀 알려주면 좋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알음알음으로 MBC에서 90분 경기를 아주 재미있게 지켜봤습니다.
비록 평가전이지만 영국에서 맹활약중인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이름만 들어도 든든한 우리의 ‘3총사’가 뛴다는 것도 저를 아주 신나게 만들었습니다. 매력적인 선수 김남일이 부상으로 결장하는 게 조금 아쉬웠지만 3명의 해외파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더군요.
우루과이와 시합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편으론 좀 불길한 예감도 들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작가의 조국이라는 점에서 반가웠지만, 워낙 축구 실력이 좋은데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겨보지 못한 나라여서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남미의 강호’라는 수식어가 꼭 붙어 다니는 우루과이에 우리는 그동안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더군요. 결과적으로 이 징크스는 깨지지 않아 이번 전적을 보태 4전 4패를 했지요.
더구나 우루과이 최고의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약하고 있는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축구 에세이까지 떠오르니까 주눅이 들 정도였습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1940년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출생했는데요, 라틴 아메리카의 대표적 지식인이자 탁월한 문장가입니다.
그가 쓴 축구에 관련한 에세이집을 읽고 ‘세상에 이렇게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는 탄식어린 감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외모는 또 얼마나 당당하고 멋있는지요. 세계적으로 적지 않은 좌파 지식인 지도자들이 꽤 멋진 외모를 갖고 있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이 갈레아노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당한 눈빛과 청교도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얼굴은 ‘잘 늙어가는 작가’로서 어디에 가든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풍모지요.
게다가 그 도도하고 탁월한 문장력은 저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뛰어난 글솜씨에 주눅이 들어 저는 한 때 글 쓰는 일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이런 심정을 벗에게 진지하게 얘기하자 그 친구는 저를 위로하면서 한다는 소리가 이랬습니다. “난 네 글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데 그럼 난 어떡하니”라구요... 좀 유치한 제 자랑같지요?^^
하지만 그때 저는 진심으로 이 갈레아노 선생의 글에 주눅이 들어 자신의 미욱함에 한없이 자책을 했었답니다.
갈레아노의 열혈팬이 되어 그가 쓴 책을 골라가면서 읽었습니다.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를 읽고 세계정세의 실상을 배웠습니다.
날카로우면서도 정의로운 그의 필봉을 한없이 부러워하면서 저도 제발 그처럼 글을 잘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염원을 절절히 가졌습니다.
그의 책은 한번 읽고 치우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밑줄 그어가면서 읽고 또 읽었습니다. 소설보다 더 재미있었지요. 그가 쓴 ‘불의 기억’은 아직 다 읽진 않았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3권의 그 책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행복해질 정도랍니다.
갈레아노가 쓴 축구 에세이도 지금껏 제가 읽은 에세이 집 중에 제일 수작인 것 같습니다. 작년 월드컵 때는 그 책을 무슨 바이블이라도 되는 양 소중하게 들고 다니면서 지하철이고 식당이고 어디이고 간에 시간만 나면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월드컵과 축구에 대한 별별 에피소드가 숱하게 나옵니다.
그 중에 제일 우스운 이야기는 이런 겁니다. “우루과이 아기들은 골! 이라고 외치며 태어난다. 그래서 우루과이의 분만실에선 늘 그렇게 한바탕 야단법석이 일어나는 것이다.”
갈레아노도 어린 시절에는 다른 모든 우루과이의 어린이들이 그렇듯 축구선수가 되는 걸 열렬히 소망했답니다. 하지만 밤에 잠자는 동안엔 그렇게 슛이 정확한데 낮의 그라운드에선 번번이 어긋나는 바람에 ‘발’로 하는 축구는 포기하고 ‘손’으로 하는 축구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게 바로 저를 주눅 들게 한 탁월하고 상쾌하고 코믹하면서도 감동적인 축구에세이입니다.
갈레아노는 우루과이 축구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우루과이 축구는 과거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축구를 하는 아이들도 또한 매년 줄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 사람치고 축구의 전술과 전략에 박사 아닌 사람이 없다. 축구의 역사에 관해서도 석학이 아닌 사람이 없다. 우루과이인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옛날부터 내려온 것이다. 유구한 역사의 뿌리는 아직도 살아있다. 국가 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면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전국의 숨소리가 멈춰지고 정치가, 가수, 박람회 잡담꾼들의 입이 조용해진다. 애인들의 사랑도 정지되고, 파리들도 비행을 멈춘다.”
자 이렇게 광적인 ‘축구사랑’의 나라이니 제가 걱정을 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론 제가 존경하는 갈레아노 선생도 오늘 밤 축구시합을 지켜볼 것이라는 생각에 이상하게 마음이 따스해지더군요.
물론 그 분이야 대한민국 한 구석에 자신을 존경하는 ‘광팬’이 있다는 건 전혀 모르겠지만요.^^
어쨌거나 3월24일 토요일 밤 8시 정각에 시합은 시작됐습니다.
경기 직전 울려 퍼지는 양국 국가를 들으면서 저는 좀 놀랐습니다. 처음 들어본 우루과이 국가가 하도 희한해서였습니다.
우루과이 국가는 무슨 클래식 음악 같더군요. 마치 베토벤이나 브람스 같은 유명한 음악가가 만들었을 것 같은 웅장한 교향악 풍의 국가였습니다. 문득 갈레아노 같은 당당한 문인이 필력을 뽐내며 살고 있는 것이 마치 저런 국가의 덕분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따라 부르기는 좀 어려운 그런 곡이었지만 한편의 교향곡을 듣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우루과이 선수들과 감독, 운영진들이 입술을 달싹거리면서 국가를 부르는 모습이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워낙 곡이 클래식 풍이어서 가사를 붙이기는 어려워보였거든요.
어쨌든 경기시작의 휘슬이 울리자마자 녹색 그라운드에는 푸른 말갈기를 휘날리며 대한민국과 우루과이 선수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박지성은 더벅머리를 어느새 멋지게 퍼머를 했더군요. 이천수는 노란색 염색을 풀고 자연스런 검은 장발이었습니다.
초장에 이천수의 활약은 대단했습니다. 좀 드세 보이는 인상이지만 나름 귀여워 보이는 이천수는 몇 차례나 슛팅을 했지만 골 운은 따르지 않았죠.
전반 20분과 37분에 우루과이의 부에노라는 선수가 2골을 잽싸게 성공시켰지요. 확실히 우루과이가 강호는 강호 같았습니다.
축구 해설위원의 말이 재밌더군요. 우루과이 축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가장 껄끄러운 상대라고 했습니다. 더구나 월드컵 초대 우승국가라는군요.
우루과이 팀의 리더 레코바 선수는 현재 세계 최고 축구 클럽 중의 하나인 이탈리아의 인터밀란에서 10년 째 펄펄 날아다니고 있다는군요. 그 선수 얼굴을 보니 꽤 똘똘해 보이는 미남형이었습니다.
앞으로 유능한 감독을 할 수 있는 그런 얼굴로 보였습니다.^^
지금껏 적지 않은 세계적인 축구 감독의 얼굴들을 봐왔습니다만 그들은 왜 그렇게 한결같이 미남인지 모르겠습니다. 가깝게는 06년 월드컵 때와 02년 월드컵 때 우리네 안방까지 소개되었던 축구 감독들을 유심히 봤습니다만 한결같이 ‘총명한 미모’를 자랑하는 것같은 매력 있는 사나이들이었지요.
대한민국 축구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히딩크도 빠지지 않는 외모의 소유자였죠.^^
이번 우루과이 감독도 나이는 좀 들어보였지만 제법 분위기 있는 그런 남자로 보였습니다.
다른 스포츠 경기도 마찬가지겠지만 축구는 특히 선취골이 경기의 흐름을 좌우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막판 역전승도 많이 있지만, 전반전에 두 골이나 먹은 우리 팀 선수들은 상당히 위축돼 우왕좌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루과이 선수들이 워낙 수비가 짱짱하다보니 후반전엔 변변한 슛 한번 날리지 못하더군요. 저 뿐 아니라 많은 축구팬들이 우리의 어수룩한 수비와 한발 늦는 공격에 한탄을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 선수들이 못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상대가 워낙 상대이다 보니 선수들이 역량을 미처 발휘하지 못한 게 아쉽다는 거죠.
막판에 1분인가를 남겨 놓고 설기현의 강한 왼발 슛은 비록 크로스바를 맞고 튕겨져 나왔지만 그건 골로 봐주기로 했습니다.
너무 아쉬웠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하는 설기현이 대견해 보였습니다. 보기 시원한 파워슈팅이었지요.
시합이 끝나고 베어백 감독은 우루과이 팀에게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고 말하더군요. 우루과이 선수들이 성숙하고 지능적인 플레이를 보여준 것에 점수를 많이 준 것 같습니다. 우루과이 감독은 한국팀이 자신들에게 공간을 많이 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수비가 신통치 않았다는 얘기겠지요.
어쨌거나 그나마 ‘남미 징크스’가 있는 강호 우루과이에 2대 0으로 진 게 다행이었다는 좀 쪼잔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면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전국의 숨소리가 멈춘다는 나라, 애인들의 사랑도 정지되고, 파리들까지 '비행'을 멈춘다는 나라라니 바로 이런 거국적 저력이야말로 우루과이 축구의 원동력이 아닐까요?
지구 반대편의 나라 우루과이의 한 응접실에서 혹은 카페에서 갈레아노 선생도 이 경기를 지켜봤겠죠? 그는 뭐라고 관전평을 했을까요? 그것이 알고 싶군요. ^^(나중에 검색창에 들어가 보니 우루과이의 인구는 3백만이 좀 넘더군요. 오! 대단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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