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만부나 팔린 100세 할머니 시인의 처녀시집 ‘약해지지마’

스카이뷰2 2010. 11. 9. 16:16

                                                                                시집 약해지지마

   

     75만부나 팔린 100세 할머니 시인의 처녀시집 ‘약해지지마’

 

 

어제 동네 책방에 들렀다가 희한한 시집 한권을 발견했다. 시집 하단을 감싸고 있는 하늘색 띠지에 인쇄된 문구가 눈길을 붙잡았다. ‘75만부 돌파!’ ‘아마존 재팬, 기노쿠니야, 도한 종합베스트셀러 1위!’ ‘NHK, 아사히신문, 요미우리신문 절찬’ 여기까지는 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흔한 광고 문구에 불과하다. 그런데 맨 마지막 줄이 사람을 놀래켰다. 99세 작가가 들려주는 바르고 아름다운 삶의 방식”

 

맙소사 99세라니! 얼른 책 표지를 젖히고 시바타 도요라는 저자 약력을 훑어보았더니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1911년 6월 26일, 도치기시 출생. 유복한 쌀집의 외동딸이었지만, 10대 때 가세가 기울어 음식점 등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33세 때 주방장인 시바타 에이키치와 결혼해 이듬해 아들 겐이치를 낳았다. 에이키치와는 1992년 사별. 이후 우쓰노미야 시내에서 홀로 생활했다. 취미는 젊었을 때는 독서, 영화,노래 감상. 중년에는 무용, 현재는 글쓰기. 꿈은 자신의 책이 번역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다.’

 

 

1911년! 이라면 우리 나이로는 백세(百歲)! 그러니까 지상에 태어나 무려 백 년째 살고 있다니 대단한 장수(長壽)다. 일본에선 만으로 나이를 세니까 99세라고 썼나보다. 어쨌든 놀랍다. 더구나 90세가 넘어 시쓰기를 배웠다는 대목에선 아연실색(啞然失色)! 한마디로 경이로웠다. 100살 할머니가 시집을 출판했다는 것도 아마 세계적으로 거의 최초의 일일 텐데, 거기에 75만부나 팔렸다니... ‘장수대국(長壽大國)’일본의 저력이 느껴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0살 할머니의 시집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건 기적(奇蹟)같은 일이다. 목차를

펼쳐보니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담긴 아주 쉬운 제목들이다.

어머니, 눈을 감으면, 살아갈 힘 , 아들에게, 바람과 햇살이 녹아드네, 나 , 선생님께 , 나에게, 추억, 잊는다는 것, 말, 하느님 , 병실, 너에게, 가족, 목욕탕에서, 외로워지면, 바람과 햇살과 나, 약해지지 마, 96세의 나, 저금, 하늘 , 행복 , 화장 ,선풍기 I 어깨 주무르기 이용권, 전화, 아침은 올 거야, 득 본 기분‘ 귀뚜라미, 비밀.

 

이런 제목아래 쓴 시들은 동시(童詩)처럼 천진하고 맑아서 사람의 기분을 정화시켜주는 듯했다. 서점에서 선 채로 백살 시인이 쓴 시들을 일독하고 나서 잠시 마음의 갈등을 일으켰다. 집에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꽤 많아서 당분간은 책을 사지 않으려했기에 이 시집을 살까 말까 망설였다. 그러다가 책 속표지에 실린 할머니의 생일이 내 생일과 같은 걸 보는 순간, 에잇, 한 권 사드리자 라는 ‘경로사상’이 발동했다.

백세 시인의 첫 시집이라면 ‘소장본’의 가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에 와서 차근차근 다시 읽었더니 아주 재밌고 천진한 기운이 느껴져 내 마음마저 산뜻해지는 듯했다. 99세 ‘왕 할머니’도 이렇게 수정 같이 고운 정서를 가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선생님께’라는 시를 보면 할머니는 세상사에 여전히 관심도 많고 마음은 아직 젊다는 게 느껴진다.

 

‘저를 할머니라 부르지 말고/ 오늘은 무슨 요일? 9+9는 얼마?/ 그런 바보 같은 질문도 하지 않았으면 해요/ 시바타 씨 사이죠 야소의 시를 좋아해요?/ 고이즈미 내각을 어떻게 생각해요?/이런 질문이라면 좋겠어요.’

 

 

이 호호 할머니 시인은 시집의 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아가씨 시절부터 독서나 영화 감상, 그리고 동향 출신 작곡가 후나무라 도오루 씨의 가요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후나무라 씨가 작곡한 ‘이별의 한 그루 삼나무’의 가사를 쓴, 26세에 요절했다는 다카노 키미오 씨의 시에는 몹시 감동하여 이런 시를 쓸 수 있으면 좋겠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할머니가 93세에 시를 배우러 다니고 열심히 습작할 수 있었던 것은 워낙 젊어서부터 문학을 비롯한 예술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덕인 듯하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별자리는 감수성이 풍부한 ‘게자리(Cancer)’다.

역시 타고난 별자리의 기운도 할머니를 시인으로 만드는 데 한 몫한 것 같다.

 

 

할머니는 2년 정도 시를 배우고 나서는 신문사에 투고하기 시작했다. 90대 중반 할머니가 시를 써서 유수의 신문사 문예란에 보내는 장면을 상상해보시라.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게 보낸 할머니의 시는 일본에서도 꽤 손꼽히는 산케이 신문 1면 최상단에 위치한 ‘아침의 시’ 코너에 실리는 ‘영예’를 안았다. 신문사 측에서도 매우 놀랐다고 한다. 그 후 할머니의 시는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자주 산케이 신문 ‘아침의 시’를 장식했다.

 

 

이런 인연으로 ‘아침의 시’ 담당자 아라카와 카즈에는 할머니의 처녀시집 ‘약해지지마’의 추천사를 썼다. “도요씨의 작품을 손꼽아 기다리는 건 산케이 신문 독자 여러분뿐만이 아닙니다. 편찬자인 저도 도요씨의 시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많은 응모엽서 중 도요씨의 시가 불쑥 얼굴을 내밀면 기분 좋은 바람을 맞은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지금도 여전히 싱그러운 감성을 가지고 계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요? 이는 프로 시인에게서도 극히 드문 일입니다.”

 

 

이렇게 써서 모은 할머니의 시는 처음엔 자비로 몇 백부 한정판으로 출판했다. 그러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아스카신서라는 출판사와 정식계약을 하고 초판 1만부를 발행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시집은 초판에 1천부 내외를 발행한다. 그만큼 시집은 안 팔린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초판이 일주일만에 매진되고 여기저기서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도쿄 역 앞에 있는 대형서점 야에스 북 센터에선 한달만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서점 직원은 “이 곳에서 20년 근무했는데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처음 본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 후 일본 서점가에서 팔린 베스트셀러 시집의 판매부수는 30만부가 최고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번 100세 할머니 시인의 시집 75만부가 얼마나 ‘경이로운 판매부수’인지 짐작이 간다.

 

 

이 시집을 사가는 독자층은 60대 여성들이라고 한다. 자녀들 출가시키고, 남편과는 사별해 혼자 살거나 남편이 있어도 그 나이쯤이면 모든 게 시큰둥해지는 시기여서 자칫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요즘 세상에 60대라면 예전과 달리 여전히 젊은 세대와 같은 정서를 누리는 입장들이어서 그야말로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정쩡한 세대’로서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런 ‘외로운 중, 노년층 여성’들에게 이 시인 할머니의 처녀 시집은 그야말로 험한 파도치는 암흑의 바다에서 만난 등대 같다고나 할까.

 

이 시집을 만든 편집자는 “도요씨의 시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위로의 힘이다. 99세 노인이 혼자사는 생활속에서도 삶을 긍정하고 용기내는 모습을 보고 힘을 얻는 것 같다”고 평한다.

 

 

75만부나 팔린 슈퍼 베스트셀러 시집의 위력은 대단할 것 같다. 일본의 매스컴은 할머니시인의 인생에 대해 앞 다퉈 다루고 있다. 그렇잖아도 세계에서 평균수명이 제일 높은 일본은 요 근래 ‘유령노인’의 존재가 사회문제화 되면서 ‘노인문제’가 이슈로 등장했다.

100살이 훨씬 넘은 장수노인을 찾아봤더니 이미 20 여년전 사망했다는 뉴스로 일본사회는 한동안 들썩거렸다. 세계 어느 곳이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그런 와중에 99세 할머니가 매일 고운 화장을 하고 슈퍼 베스트셀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은 비단 일본 뿐 아니라 요즘 ‘노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끌만한 일인 것 같다. 전국에서 보내오는 편지와 엽서를 읽는 게 요즘 할머니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동안 TV 출연도 여러 번 했다. 특히 지난 5월 후지TV에 시를 낭송하는 모습이 방송된 후 시집 판매가 부쩍 늘었다.

 

 

할머니의 시는 낫또 광고에도 나오고, 노인 상대 피싱 사기 예방 포스터에도 쓰인다. 시를 달라고 조르는 잡지들도 줄 서 있다. 시사주간지 ‘아에라(AERA)’의 한 기자는 “90세가 넘어 창작활동을 하는 경우는 초 고령사회 일본에서도 극히 드물다. 점점 더 많은 미디어가 도요 씨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른바 ‘스타’가 된 것이다.

 

 

시인 할머니는 말한다. “이 나이에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일은 정말 괴롭습니다. 힘들어도 나는 힘을 내서 침대에서 일어나, 버터나 잼을 바른 빵과 홍차로 아침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날 도우미가 해줄 청소나 빨래를 정리하거나 장 볼 목록을 만듭니다. 또 공공요금 수납 등을 포함한 가계부와 통원 스케줄 등을 생각합니다. 상당히 머리를 쓰는 셈으로 바쁜 편입니다. 혼자 산 지 20년,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요즘도 할머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고운 화장’을 살짝 하고 7시30분엔 손수 마련한 아침 식사를 가볍게 한 뒤 도우미가 올 때까지 ‘준비’를 한다. 하지만 기력이 달려 바퀴달린 보조기구에 의존해 움직인다. 1주일에 6번 도우미가 오고, 외아들이 한번 찾아오는 일상을 반복하는 것도 그저 감사할 뿐이라고 할머니는 말한다. 시 쓰는 일은 ‘집중력’을 필요로 해 그들이 돌아간 뒤 저녁 시간에 쓴다고 한다.

 

<아래 시는 할머니 시집의 표지작입니다.>

 

 

약해지지 마

저기, 불행하다며

한숨 쉬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