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비싼 무라카미 하루키 선인세(先印稅)

스카이뷰2 2009. 7. 16. 09:50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1Q84의 표지.

                                               올해 환갑인 무라카미 하루키.

  

  

           너무 비싼 무라카미 하루키 선인세(先印稅)


며칠 전부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질투라고나 할까, 아니면 선망이라고나 할까. 아무래도 선망과 질투를 섞은 감정에 자신의 무능함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내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지난 주 초 신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제의 최신작 ‘1Q84’의 국내 판권이 1억 엔이 넘어섰다는 기사를 보면서였다.


국내 판권은 문학동네라는 출판사가 따냈는데 국내의 쟁쟁한 출판사들이 뛰어든 이 ‘판권 경쟁’에서 한 중소출판사가 1억엔(13억 3천만원)을 제시하고도 계약에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제아무리 일본에서 대히트한 소설이고, 하루키의 브랜드가 워낙 대단하다지만 일개 번역소설 선인세로 13억원 이상을 지급하면서까지 ‘판권 전쟁’을 벌인 국내 출판사들의 행동이 ‘추태’로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판권은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출판사들이 제출한 자사 출간이력 등을 검토한 끝에 문학동네를 ‘낙점’한 것이라고 한다.

문학동네가 제시한 선인세는 8000만엔 대라지만 우리돈으로 10억원이넘는 거액이다. 민음사· 문학사상사 열린책 등 출판사 10 여 곳이 경쟁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듣다보니 하루키가 ‘돈만 보고 계약하는 무뢰한’은 아니라는 출판사의 홍보전략이 넌지시 느껴지는 것 같다.

그렇잖아도  며칠 전 광화문 교보문고 외서코너에 문제의 소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책을 펼쳐 보려했다가 비닐 커버로 밀봉된 것을 보고 은근히 화가 난 적이 있다. 


교보문고 외서코너에서 소설책을 밀봉해 진열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아무리 ‘마케팅 전략’이라지만 그런 밀봉 판매행위는 독자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한다. 번쩍거리는 비닐로 포장된 하루키의 소설책을 보는 순간 읽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나 버렸다.


사실  하루키의 이 ‘1Q84’에 대해선 지난 6월1일 우리 블로그에서도 소개했었다. 소설의 내용은 헬스클럽 매니저이면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30대 여성 아오마에와 대학입시 학원 수학강사이면서 소설가 지망생인 덴고를 중심으로 신흥종교집단의 내부 폭력과 잔인성, 20년만에 재회한 두 초등학교 동창생의 사랑이야기 등을 복합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제까지 하루키의 소설들을 헤아려 볼 때 그렇게 색다른 소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10여년전 일본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신흥종교 옴진리교 사건을 르포형식으로 펴낸 적이 있는 하루키로선 이번 그의 소설 역시 그때의 이야기와 이미지가 꽤 비슷하다. 혹시 그래서 밀봉판매를 한 것은 아닐까?


미안한 이야기지만 하루키 소설은 소설 그 자체로 대단한 것은 아니다. 내 경우엔 오히려 그의 에세이를 더 재밌게 보곤 했다.

물론 그의 작품 전체를 폄하하려는 이야기는 아니다. 30년 가까이 소설가로서 살아온 무라카미 하루키에겐 ‘남다른 매력’이 있는 것 같다.


일단 그의 소설이나 에세이는 ‘쉽게 읽힌다’. 아마도 그가 오늘날 이렇게 대성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쉬우면서도 매력적인 문체’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스타 기질’이 넘쳐 자신을 줄곧 대중에게 어필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마라톤 맨으로서의 자신을 널리 알리고 ‘마라톤 예찬’책을 내는가 하면 ‘떠돌이 여행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그럴싸하게 포장해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물론 유료로.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하루키라는 스타작가는 자신의 ‘숨쉬기’마저도 매혹적인 문체로 포장해 책으로 엮어낼 작가이다.


그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남자다.

같은 말을 해도 젊은이들 구미에 딱 맞게 말한다. ‘언제나 운동화를 신고 달리는 소년처럼  살고 싶다’는 작가는 아마도 그가 유일한 것 같다.


자녀를 두지 않고 사진작가인 아내와 단둘이 살고 있다는 그는 고양이 마니아로 자신의 사진에세이집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그의 삶은 젊은이들에겐 상당히 어필하는 보헤미안적인 라이프스타일일 것이다.


피츠제럴드를 사숙한 하루키는 일본문학은 ‘시시한 것’쯤으로 여기는 듯한 기운을 살짝 풍기면서 언제나 자신은 서구 문학 쪽에 가까운 것을 과시하기도 한다.


명문대학 라벨에 약한 일본인에게 와세다출신의 그는  미국 명문대인 프린스턴이나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하고 강의도 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처럼 소개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색다른 일본인’으로서 매력적으로 돋보일 수 있다. 요즘도 그는 영미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번역문학가로서도 활동하고 있다. 영어에 약하다고 알려진 대부분의 일본사람들에게 하루키는 대단한 사람이기도 하다. 


재즈에도 일가견이 있고 요리솜씨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팔방미인 같은 그의 일상생활은 비단 일본인 뿐 아니라 한국은 물론 전세계 40여 개국 문학도와 문학 팬들의 가슴을 휘젓는다. 그는 조금은 어눌한 듯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하나의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선보였고 대박을 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문학세계 뿐 아니라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매혹당하기 쉬운 ‘보헤미안적 기질’을 뿜어내면서 육십 평생을 저렇게 소설을 비롯한 문학작품을 써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일본보다는 그리스나 유럽 일대 미국 등지를 떠돌면서...


그렇기에  나에게도 하루키라는 작가 자체의 이미지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하루키라는 작가는 이미지가 꽤 괜찮은 남성작가였다. 그의 신작이 나오면 일단 읽어주는 것이 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이번 ‘번역 선인세’ 혈투와 ‘밀봉 판매’로 인해 며칠 전부터 왠지 편치 않은 심정에 빠지게 된 것이다. 번역 선인세야 내 돈이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리 기분 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왠지 기분이 안 좋다. 자세히 따져보니 내돈이 나간다고도 할 수 있다. 선인세많이 주면 책값이 그만큼 비싸질 테니까. 돈내고 책을 사 볼 독자인 나로선 그만큼  부담이 높아질 것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위에서 말했듯 하루키에 대한 질투와 선망이 소설을 쓰지 않고 있는 무능한 자신을 희롱한다고 여겼기에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늘 ‘멋진 소설’을 써보리라 맹서해온 자신의 다짐을 아직까지 이뤄놓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소인배적 관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출판계의 풍토가 한심해서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문제의 하루키 소설은 지난 5월 말 일본에서 출간된 후 두 달 만에 2백만 부가 팔려나갈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이것도 꽤나 부러운 현상이다.)


게다가 한국에서도 ‘선인세’만 무려 10억원이 넘게 지불했다니 올해 환갑인 하루키의 지갑은 다른 어느 해보다 두둑해질 것 같다. 책을 써서 돈을 그렇게 번다는 건 다른 어떤 일보다 유쾌하지 않은가!


5년 전인가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선인세는 5억원 선이었다. 불과 몇 년 사이 거의 두 배 가까운 선인세를 지불한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노예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고, 문화적 수탈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언젠가부터 한국의 판권 경쟁은 ‘장님 제 닭 잡아먹는 형국’으로 국제도서시장의 봉 노릇을 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올해 초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의 신작 ‘솔로몬의 열쇠(가제)’에 선인세 1백만 달러를 주면서 번역소설 ‘최고가 시대’를 열었다. 이런 과열선인세 현상은 출판중개업자들의 농간도 한몫했다고 한다. 저쪽이 얼마 더 넣었더라 뭐 이런 식으로 경쟁을 시키다보니...


1990년대 2만달러 정도였던 번역 선인세는 출판사들의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2000년대 초반엔 10만~ 20만 달러였다. 그러다 최근 2,3년 사이에 무작정 치솟고 있다. 그만큼 출판사들이 ‘노다지’ 환상과 ‘신기루’착시현상에 혈투를 불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하기야 ‘돈이 보이는데’ 결사쟁투를 벌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보다 큰 모욕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문화적 사업’을 한다는 출판계에서 노다지 캐는 곳에 모여든 시정잡배들처럼 ‘돈 투기’를 한다는 건 대한민국 국격(國格)에도 손상이 가는 현상이다.


늘 불황에 시달린다는 출판업계로선 하루키만한 ‘대목’도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10억 원 씩 선인세를 지불한다는 건 대한민국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불유쾌한 일이다.

국내 작가들의 인세지급엔 몹시도 인색한 것으로 소문난 유명출판사들이 하루키에게 매달려 그런 꼴을 보였다는 것은 한국인의 자존심을 훼손한 행위라고도 할 수 있다. 

 

조금전 인터넷뉴스에서 본 어떤 댓글에는 '하루키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간절한 주장도 있었다. 그런 리플 단 사람의 심정을 백번 이해한다.

하루키 과열선인세 경쟁은 이래저래 일본사람들 자존심만 북돋워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