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양조위의 더 깊어진 눈빛 연기와 존재감

스카이뷰2 2011. 2. 20. 19:09

 

 

 

<화양연화>

 

           

 

    

           양조위의 더 깊어진 눈빛 연기와 존재감 

                                 

                                                                                                                              

 

20대의 양조위는 눈빛이 선량하고 맑은 청년이었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만든 슬픈 영화 ‘비정성시(悲情城市)’에서 농아 청년으로 나온 양조위는 특유의 눈빛 연기로 스크린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사진관을 운영하지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년이 후일 자신의 아내가 될 아가씨에게 ‘로렐라이의 전설’에 대해

서로 필담과 수화를 나누는 장면은 퍽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결혼식 장면에서 모자 쓴 양조위가 아주 경건하게 예를 올리는 모습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흘러 아기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간이 정거장에 서있는 모습도 페이소스가 느껴져 참 좋았다.

‘비정성시’의 감독은 양조위를 자신의 영화에 꼭 출연시키고 싶었는데 그가 대만어를 모르자 배역을 아예 청각장애인 역으로 만들어 출연시켰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도 있다.


‘비정성시’에서 양조위는 영화계에서 대성할 예비스타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1989년, 그의 나이 26세 때 이야기다. 그 후로도 그는 꾸준히 변함없이 좋은 배역, 좋은 연기로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왔다. 방황하는 청춘 군상들의 일상을 그린 ‘중경상림’에서도 양조위는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그의 연기는 나이와 함께 점점 무르익었다. 아마 '나이의 힘'이 이 배우에게도 생겼나보다.  

2000년인가, 그는 애틋한 사랑을 그린 ‘화양연화’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아시아권은 물론 세계적으로 자신의 배우적(的) 존재감을 높였다. ‘이웃집 여인’ 장만옥과의 닿을 듯 말 듯한 사랑의 교차점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둔중한 첼로 선율이 흐르는 슬픈 배경음악도 양조위의 분위기와 딱 맞아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에서 그는 더블 버튼 양복에 멋진 중절모를 눌러 쓴 잰틀맨으로 언제나 깍듯한 매너를 보여주었다. ‘화양연화’라는 제목부터가 양조위와 참 어울리는 듯했다. 인생의 가장 좋은 시기를 나타내는 한자어로 역시 표의문자의 위력을 은근히 느끼게 한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그런데 왠지 이 제목 자체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인생의 비애로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어쩌면 나의 지나친 감상주의 성향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영화를 보기도 전에 이 ‘화양연화’라는 제목에서 예사롭지 않은 우리네 인생살이의 슬픈 기운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


1962년생. 이제 하늘의 뜻을 알수 있다는(知天命)의 50대에 막 접어든  요즘, 양조위의 눈빛은 더 깊어지고, 더 연민어린 눈빛이다 .

숱한 논란을 일으키며 화제를 모았고, 2007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음으로써 ‘작품성’도 인정받았다는 ‘색·계’에서 양조위의 눈빛 연기는 더욱 깊어진 것 같다.


몇해 전, ‘색·계’를 꼭 봐야한다는 친구들의 강권에 못이기는 척, 아직 보지 않은 친구와 함께  명동의 한 극장에서 양조위와 만났다.  양조위가 누드로 나온다는 둥, 무삭제 개봉이라는 둥, 영화사의 홍보 방법이 영 마땅치 않아 보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하지만 양조위의 연기가 대단하다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듣다 보니 양조위 팬을 자처하는 처지에 그냥 넘어가기가 좀 아쉬웠었다.

 

워낙 소심한 성격이라서 이 나이에도  '센슈얼한 장면'을 내세워 홍보하는 영화는 될수록 피하곤 한다. '색,계'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탕웨이라는 신인 여배우의 데뷔작인데도 '파격적인(?) 신'을 무리없이 해냈다는 얄팍한 홍보 방법은 영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사가 손님 끌 요량으로 강조한 ‘그런 쪽’의영화’는 아니었다. 역시 양조위의 깊은 눈빛연기와 함께 ‘금단의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 만들기에 솜씨를 보여 온 이안 감독의 능력이 다시한번 진가를 발휘한 영화였다.

사랑에 목숨 건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 이런 주제는 필경 파국을 부르는 비극적 결말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목숨이 하나뿐인데 그깟(?) 사랑에 올인해버리면 나머지 삶은 어떻게 되겠나.

 

문득 이안 감독이 만들었던 <브로크 백 마운틴>이란 영화도 떠오른다. 이안 스스로도 브로크백마운틴이 천국의 사랑이라면 색`계는 지옥의 사랑이라는 말도 했다. 천국과 지옥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역설적인 말도 있듯이 이 두 작품이 보여주는 슬픈사랑의 본질은 결국 종이 한장 차이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시아권 출신의 남자배우들 중 양조위만큼 연기력이나 외모가 매력적인 배우는 흔치 않을 듯하다. 젊은 시절의 양조위는 착한 남동생 스타일의 배우로 배역도 거의 모두 선한 역만 했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자신은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잘생긴 남자역을 주로 맡아왔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주 오~래 전 ‘의천도룡기’라는 중국 드라마를 시리즈로 빌려다 재밌게 본 시절이 있었다. 그때 선한 주인공 청년이 바로 양조위였다. 그가 아마 20대 초반 무렵이었을 게다. 그 후 ‘비정성시’에서 가슴 아리게 하는 청각장애인 역을 열연하는 양조위를 보며 바로 그의 팬이 되었다. 그러니 '팬'으로서의  세월이 만만찮게 흘렀다. 


‘중경삼림’은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쿨하게 다룬 작품이라서 주인공인 양조위의 역할이  더 매력적으로 빛났다. 하지만 무간도 같은 갱스터영화는 취향에 맞지 않아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양조위 표’ 액션영화가 어떤지 싶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워낙 ‘천부적 재능’이 있는 연기자답게 양조위는 어떤 배역을 맡아도 살아서 펄펄 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색·계’는 아마 ‘화양연화’ 이후 오랜만에  양조위의 농익은 연기력을 고스란히 보여준 영화 같다.

 

언젠가 유명 목사님의 설교가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이 늘 강조한 포인트 중 하나는 사람들이 ‘본질은 보지 않고 현상’만 보려한다는 것이었다. 신앙심 약한 현대인들의 문제점을 목사님의 시각에서 정확하게 적시한 듯하다. 비단 신앙심의 차원만은 아닐 것이다. 


그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영화 ‘색·계’의 본질은 ‘슬픈 사랑이야기’로서 인간의 진실한 사랑은 어디까지가 그 한계인지를 가늠해 보는 영화인 듯다. 영화에서 슬픔이 어려 있는 듯한  양조위의 매력적인 눈빛연기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물론 신인 여배우 탕웨이의 눈빛도 신인 답지 않게 당돌하면서도 숙연하다. 조국의 독립이냐 사랑이냐,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목숨을 버려야 하는 비운의 여주인공 답다.

 

이 영화의 본질은 ‘슬픈 사랑의 진실’이므로 영화사가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 ‘무삭제 개봉’운운은 본질은커녕 현상에도 낄 수 없는 아주 지엽말단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다. 아니, 오히려 영화의 본질을 흐려놓고 폄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얄팍한 장사 속으로 주판을 굴리는 영화사의 입장에서는 '고상한 본질’은 자칫 호소력이 약할 것이라는 오판 아래  그냥 ‘양조위가 벗고 나온다는 쪽’에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관객의 수준을 너무 낮춰 본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영화팬들의 지적 심미안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를 영화사는 미처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어쨌거나 슬픈 영화 ‘비정성시’ 못잖게 ‘색·계’도 굉장히 슬픈 사랑 영화다. 그러니 연기력 탁월한 양조위로선 ‘물 만난 고기’처럼 ‘이것이 연기다’라며 그의 깊어질 대로 깊어진 눈빛 연기를 우리에게 선사해주고 있다.

그 깊은 눈빛은 열 마디 백 마디 대사보다도 훨씬 강렬한 매력을 내뿜는다. 아마 양조위 자신도 '목숨'걸고 연기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화양연화’ 시절 만해도 양조위는 ‘동생뻘 남자배우’로 여겼는데 이젠 거의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세대 배우’처럼 보여서 한층 더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자신은 안 늙고 양조위만 늙었다는 얘긴 아니다.^^ 그만큼 영화에서 차지하는 그의 배역이 중후했다는 얘기다.  검색창에 들어가 보니 양조위는 나보다 하루 늦게 태어난 6월 27일생, A형. 게자리인 별자리와 혈액형이 같다는 데서 무슨 대단한 연대감이라도 발견한 듯한 기분 좋은 착각이 들었다.액형과 별자리가 같다는 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도 상당부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서 동지애마저 느껴진다. 


그는 일본의 작고한 탐미주의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좋아한다고 했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고백’에서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한국 남자배우 중 이렇게 문학적 취향이 비슷한 사람은 아직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중화권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당대 최고로 매력적인 남자 배우가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게 그렇게 대견스럽게 여겨질 수가 없다. 국내 어떤 아티스트도 이렇게 ‘맞춤형’으로 기호가 같은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기에 한켠으론 꽤 신기한 느낌이다. 

 

아무튼 더욱 깊어진 양조위의 눈빛연기는 영화의 품격을 격상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색,계'는 베니스 영화제 뿐 아니라 대만의 금마장 영화제에서도 온갖 상을 모두 휩쓸었나 보다.

양조위! 20대 때보다 더 멋지게, 보기 좋게 나이 들어가는 중년의 매력적인 배우가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흡족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