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랑스 문화훈장 잇따라 받은 윤정희 백건우 부부

스카이뷰2 2011. 4. 8. 14:39

                                

                                                    2011년 4월 5일 윤정희 백건우부부와 미테랑 프랑스 문화부 장관(연합뉴스 사진)

 

                                 

엊그제 ‘佛훈장 받은 한국인 첫 예술인부부 탄생’이라는 제목아래 윤정희 백건우 부부가 프랑스의 문화부장관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실린 기사를 보면서 문득 세월이 참 많이 흘렀다’는 구태의연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상의 왼쪽 칼라에 빛나는 훈장을 단 채 환히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윤정희는 경력45년 된 여배우의 관록(貫祿)을 한껏 보여주었다. 우리나이로 68세가 된 윤정희는 전성기 시절 뽐냈던 ‘상큼한 미모’는 세월에 마모되었지만, 노경에 접어든 여배우로서의 자존심과 품위가 서려있는 편안한 표정이어서 보는 사람에게 안도감을 선사했다.

 

그는 "프랑스 문화부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이 저의 영화 인생을 인정해줬다는 데 기쁨을 느낀다"며 "이 훈장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더 열심히 영화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는 소감을 말했다.

아내보다 두 살 연하로 외조도 잘하고 내조도 잘 누리는 것으로 유명한 남편 백건우는 "날아갈 듯이 기쁘다"면서 "미테랑 장관이 한국 영화, 특히 아내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많은데 놀랐다"고 말했다

 

윤정희는 작년 영화 '시'로 16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 대종상 여우주연상과 호주 아시아태평양 스크린 어워즈 여우주연상을 받는 등 지난해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휩쓸었다. 한국 여배우가 67세에 여우주연상을 탄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16년 전, 그는 쉰 살 때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그때도 그렇게 나이든 여배우가 주연여우상을 탄 건 처음 있는 일이어서 화제였다. 세월과 함께 더 빛을 발하며 한국 영화사에 ‘신기록’을 갱신해온 ‘올드 스타’ 윤정희가 대견스럽다. 아래  ‘충무로의 영원한 연인 윤정희’라는 제목으로 예전에 쓴 졸문(拙文)을 다시 싣는다.

 

 

 

 

 

 

윤정희 1967년 데뷔작 <청춘극장>

 

                                                                                                       

 

충무로의 영원한 연인 윤정희

 

 

1994년 4월 2일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에서 <만무방>으로 여우주연상을 따낸 윤정희는 감격에 겨워하며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특유의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저 영화 계속 할 거예요”라며 울먹이는, 쉰 문턱에 들어선 이 중년 여배우에게 객석의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우리나라처럼 여배우들의 연기생명이 짧은 영화계 풍토에서 그는 나이든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도 배우 정신에 기여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마 그 나이의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찬 것은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윤정희는 1966년인가 120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똟고 은막에 데뷔, 60.7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의 톱스타였다. 그 때 ‘여배우 트로이카’라고 해서 윤정희 남정임 문희 이렇게 세 여배우가 한국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었다. 남정임은 40대 중반에 요절했고, 문희는 한국일보 사장아들과 결혼하면서 은막을 떠나 결국은 윤정희 혼자 남게 되었다.

 

나이와 함께 ‘뒷방’으로 밀리는 게 여배우의 ‘숙명’이어선지 신인여배우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윤정희는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이런 세월의 굴곡을 겪고 1994년 나이 쉰에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는 건 윤정희라는 여배우의 집념과 근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철없던 어린 초등생 시절 영화배우를 무척이나 동경했던 나는 신문에 실린 예쁜 여배우의 사진을 보고 한참이나 부러워했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윤정희였다.  그 시절 신문엔 여배우 이름도 한자로 썼는데, 윤정희의 가운데 정(靜)자가 마침 내 이름에도 들어있어서 무척 자랑스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1991년인가 청와대에서는 당시 노태우대통령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문화예술인의 시 낭송의 밤’행사가 있었다. 그때 윤정희는 여배우답게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왔다. 회사 일로 그 자리에 참석했던 나는 내가 동경하던 ‘꿈의 여배우’를 25년 만에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다. 

 

48세인데도 여전히 예쁜 기운이 남은 여배우는 교통이 너무 막혀 혼났다며 동갑내기 연극배우 손숙에게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여배우의 그런 푸념을 함께 듣던 나는 생활인으로서의 그의 모습에서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이윽고 낭송회가 시작되자 그는 순간적으로 다시 ‘배우의 얼굴’로 돌아갔다. 청중 앞에서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을 약간 떨리는 음색으로 낭송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여배우로서의 매력으로 가득했다.

그날, 여러 명의 멋쟁이 여성 인사들이 시를 낭송했는데 내 개인 취향으로는 그가 제일 멋지게 보였다.

 

물론 낭송하는 시가 워낙 좋았던 탓도 있었겠지만 국민학생 시절부터 동경하던 여배우가 청와대에 초청받아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내가 직접 볼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는 그날의 ‘본전’은 충분히 건졌다는 치기어린 생각마저 했다.

그 얼마 후 윤정희는 서정주시인의 시집 ‘화사집’에 실린 시 스물네 편 전부를 음악과 함께 낭송해 담은 카세트테이프와 콤팩트디스크를 내놓았다. 그가 낭송하고 남편 백건우가 배경음악을 반주한 이 낭송집은 아마 국내에서는 최초로 여배우가 선보인 ‘문화상품’이었을 것이다. 역시 ‘총명한’ 윤정희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정희 부부는 평소 서정주 시인을 부모처럼 깎듯이 모셔온 인연으로 ‘화사집’ 출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일에 앞장섰다고 한다. ‘예술인 부부’의 향기가 느껴지는 멋진 문화적 풍경처럼 보였다.

 

파리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그는 “유럽에서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 시를 외워오도록 하는 것이 숙제이며 학교 교육에서도 시와 함께 사는 생활을 가르친다”면서 “우리도 어린아이 시절부터시를 가까이 하는 습관을 길러주면 여유 있고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여배우로서 이 정도의 시에 대한 ‘철학’을 갖는다는 것도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영화계에서는 윤정희를 똑똑한 여자라고 부른다. 그의 눈빛에는 총기가 어려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석사 여배우로 한때 그가 출연하는 영화 광고문안에는 늘 이 ‘최초의 석사 여배우’라는 글귀가 반드시 들어갈 정도로 학구파 여배우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게다가 그는 여배우로는 또 최초로 파리 유학을 결행, 명실상부한 지성파 여배우로 대접받았다.

 

60년대 당시로는 거금 5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공모한 <청춘극장>의 히로인 오유경 역 모집에 당당히 합격하여 스크린에 데뷔한 그는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을 따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청춘극장’에는 허은옥 역에 고은아가, 백영민 역에 신성일이 캐스팅된 초호화 배역이었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윤정희는 자존심 강한 여배우로 알려져 있다. 20대 한창 시절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한 여배우보다 자신의 배역이 다소 처지자 감독에게 “이런 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며 영화출연을 거부하고, 그 때부터 영화사 전속이 아닌 프리랜서로 뛰기 시작했다. 이것도 여배우로선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고 나자 그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분례기> <안개> <장군의 수염> <석화촌> 등 300 여편에서 주연을 맡았고, 대종상, 아시아 영화제 등에서 주연상을 휩쓸었다.

 

한 7년 쯤 영화에 매달리다가 그는 돌연 파리 유학을 결행한다. 74년의 일이다. 그 때 장안에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지금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여배우가 해외로 나가기만 하면 이상한 소문들이 금세 퍼지는 국내 연예계의 풍토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파리유학은 당시 그에게는 그 어떤 행복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 행복이었다고 고백했다. 60년대 그와 함께 ‘황금의 트로이카’라 불렸던 문희 남정임 등이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갈 때도 그가 영화인으로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이런 지적 탐구욕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공부하는 여배우로 후배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는 그는 이제 단순한 연기자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작품을 직접 선정, 제작까지 하는 본격적인 영화제작자로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감독으로 나설 준비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욕심이 많은 영화인이다.

 

여전히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그의 저력은 미모에만 의존했던 종래의 여배우들과는 달리 의식을 갖고 문화적 감각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온 그의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의 방센 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충무로 영화판에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PS: 최근 서울에 온 윤정희는 여전히 파리의 그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윤정희 백건우 부부는 ‘이방인 예술가 부부’로서 그 동네의 ‘문화적 보물’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한다. 여배우이전에 ‘알뜰한 주부’로서 윤정희는 남편의 헤어커트를 직접 맡아하고 자가용 없는 검소한 삶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여기는 아주 특별한 여배우다. ‘시(詩)’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는 칠십 팔십 구십에도 여우주연상을 받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걸기대(乞期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