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로부터 얻는 사소한 행복
시(詩)를 쓸 줄은 모르지만 시를 보면서 행복해할 줄은 안다. 시를 읽으면 굳어졌던 감성에 새순이 돋는 것 같다.
늘 시를 읽는 건 아니지만 내 영혼이 허기진다 싶을 땐 언제나 ‘시’를 읽으면서 허기를 달래곤 한다.
오늘 아침 신문에 실린 조정권 시인의 시 ‘은둔지’는 조춘(早春)의 아침, 홀로 음악을 듣는 내게 은성(殷盛)한 선물로 다가왔다.
세파에 시달린 나의 영혼에 포근한 안식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든든한 정서적 원군을 얻읃 듯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다.
아주 오래 전 이 시인의 시를 읽고 전율의 감동이 찾아왔다.
마치 파블로 네루다처럼 ‘시가 나를 찾아온’ 크나큰 행운의 시간이었다.
바로 아래 소개한 산정묘지1이다.
명징(明澄)한 영혼, 청결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정화시켜주는 ‘시의 위대함’을 느끼면서
시의 고결함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산정묘지의 시인 조정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시 ‘은둔지’는
참으로 오랜만에 시와의 교감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신비한 영적 체험의 순간을 갖게 했다.
시인은 새로 펴낸 ‘고요로의 초대’라는 시집에서 자서(自序)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막스 헤르만의 잠언 중 ‘바라는 것’을 옮겨 심었다. 몇 백 년 된 고목(古木)같기도 하고
이제 막 싹 눈을 틔운 묘목(苗木)같기도 한 이 잠언은 중년의 인생에는 깊이 새겨둘만한 시 같다.
'소란스러움과 서두름 속에서도 늘 평온함을 유지하기를./
정적에 싸인 곳을 기억하기를./ 한때 소유했던 젊음의 것들을 우아하게 포기하고/
세월의 충고에 겸허히 의지하기를./ 자신에게 온화하기를.'(막스 헤르만, ‘바라는 것’)
오늘 아침, 이젠 노경에 들어섰지만 ‘한때는 맑은 문청(文靑)’ 기운이 눈부셨던 조정권 시인의 시 ‘은둔지’와
젊은 시절 내게 큰 감동을 선사했던 연작시 ‘산정 묘지’ 로 인해 혼탁해진 영혼이 샤워를 한 듯 개운한 기분이다.
공원 한 모퉁이 잔디밭에서 봄날의 새 순을 우연히 발견한 것 같은, 시골 다방 앞에서 동백꽃 피어있는 화분을 봤을 때처럼
금전으로는 구매하기 어려운 깨끗한 행복을 한아름 선물 받은 듯하다. 감성(感性) 충만한 아침이어서 감사한 마음이다.
산정묘지 1
조정권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의 일각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에 서는 것.
(중략)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에 뿌려진 생목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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