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방문했던 백남준.(연합뉴스 사진제공)
'사기꾼' 백남준의 상쾌한 어록들 -예술은 사기야, 고등 사기
어젯밤 늦게 TV를 통해 ‘예술가 백남준’특집을 보면서 잊었던 옛 친구를 오랜만에 만난 듯한 행복한 기분을 느꼈다.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렇게 시공과 생사를 초월한 천재예술인과의 만남은 나를 기운 나게 만든다.
TV화면에 소개된 백남준의 예술가로서의 인생여정은 숙연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역시 천재 백남준이다’라는 느낌이 새삼 들었다. ‘바보상자’로만 인식되어온 TV를 전 세계 인류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 일찌감치 내다본 선각자로서 그의 ‘통찰력’과 ‘명민함’, 탁월한 식견 등은 ‘대한민국’이 배출한 세계적 예술가로서의 존재감을 확연하게 보여줬다.
그의 일본인 부인 구보타 시게코는 “남준은 밥 사먹을 돈도 아껴가면서 새 TV를 어렵사리 구입해 그걸 바로 분해하고 깨부수는 행위를 되풀이 하는 걸 보면서 예술이라는 게 너무 험난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지금도 남준은 나와 대화하고 나는 남준과 대화한다”는 말을 했다.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연속성은 두 예술인 부부를 여전히 강한 유대감으로 이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오래된 연인들’이 부부의 연을 맺고 또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았지만 그래도 계속 서로 대화한다는 이야기는 어떤 영화 속 러브스토리보다도 강한 감동을 주고 있다.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서울의 대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당시엔 매우 희귀한 일이었지만 유치원다닐 무렵부터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독선생으로 초빙해 피아노를 배웠다.
그렇지 않아도 타고난 ‘게자리 태생의 예술적 소양’은 ‘부자아빠’의 선견지명으로 일찌감치 그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 같다.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동경대학에서 철학을 독일과 미국 뉴욕의 대학에서 유학하면서도 그는 끊임없이 “나는 예술을 할거야”라고 중얼거리며 학창시절을 보낸다. 그 후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의 ‘집결지’인 뉴욕에서 ‘해괴한 이벤트’로 만천하에 황색인 예술가 백남준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별자리 도망은 못가는지 백남준은 선후배나 동료 예술인들 중 어려운 사람들은 어떡해서든 ‘돈’과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곤 했다. 그의 예술인 친구, 후배들은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백남준을 회고하며 그리움의 눈물을 쏟는 모습에서 생전의 백남준이 얼마나 ‘인간적으로 따스한 남자’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처녀시절부터 무려 14년간 백남준을 스토커처럼 따라다녀 기어코 ‘결혼’이라는 제도권으로 백남준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던 일본인 부인은 이젠 뚱뚱보 호호백발 할머니로 변했으면서도 ‘남편’으로서의 백남준보다 수십 년 전 ‘잘생긴 연인’으로서의 그를 자랑하며 ‘행복한 눈물’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을 모국으로 둔 이 세계적 예술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은 모국에서는 불과 십수년을 살았지만 그의 ‘모국어 수준’은 옛날 서울토박이 말씨를 고스란히 구사한다. 무척 정겹게 들리는 서울 말씨에서 백남준을 지켜준 건 바로 그 토박이 서울 말씨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대한민국 서울은 무슨 전시(戰時)처럼 소란스럽고 황폐해진 분위기가 점령군처럼 진주해 있지만
이렇게 만추(晩秋)의 심야, ‘세계적 예술인 백남준’의 순수한 영혼과의 ‘조우’는 잊고 있던‘예술 본능’을 일깨워주며 ‘외로운 사냥꾼’같던 마음에 따스한 눈물을 선사해준다.
*아래 2006년 백남준의 부음(訃音)을 듣고 제가 썼던 글을 소개합니다.
‘사기꾼' 백남준의 상쾌한 어록들
2006년 설날 연휴 때 미국으로부터 날아온 ‘백남준의 부음’은 마치 친족의 부고처럼 가슴을 에었습니다. ‘볼 수 없어도 그 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는 존재 하나가 이 지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인생의 비애를 느끼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자’가 느껴야할 몫인 듯했습니다.
아무런 인척관계도 아니지만 가끔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천재성이 담긴 어록’들은 때때로 삶의 활력소가 되곤 했거든요.
살아생전에 만난 일은 없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그의 행적들에 대한 기억이 아슴프레하게 떠오르면서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이 일반인에게는 비타민처럼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예술가의 오래전 모습은 주로 신문 사회면에 외신발(外信發)로 백 아무개가 특이한 행위예술을 하다가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종류의 뉴스였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지금 신문에 소개된 그의 지난 연보를 보니 그게 바로 무어맨이라는 여성 첼리스트와 반나(半裸)로 뉴욕의 멋쟁이 관객들 앞에서 퍼포먼스를 했다는 내용이더군요.
아무튼 백남준에 대한 기억의 시작은 그렇게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습니다.
1984년이던가요, 서울과 뉴욕과 파리를 동시에 잇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그의 작품과 함께 새해 벽두를 장식하면서 “예술은 사기야 고등 사기”라고 외쳐대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아마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백남준이라는 사람’을 확실하게 알게 된 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들을 이것저것 읽어보니까 역시 ‘백남준은 천재 예술가’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유랑하며 ‘영원한 이방인’의 삶을 살아내면서 그가 말한 인생에 대한 ‘어록’들을 보면 힘이 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뭐랄까요, 인생의 쓸쓸함 같은 것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됩니다.
예술이 사기라고 외친 그는 예술가에 대해서도 “익은 밥 먹고 선소리 하는 존재”라고 정의합니다.
예술에 대해 ‘심드렁하게’ 말하는 그를 보면 대가의 경지가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일반인들이 ‘어렵고 골치 아프게’ 여기기 쉬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그와 같이 간단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숙려(熟慮)기간’을 거쳤다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
그는 예술에 대해 이런 말도 했습니다. “예술이라는 게 사실은 사고파는 문제와 다름이 없는데, 예술은 맹그는 놈은 4백만 명이 만들고 있는데, 그것을 사는 놈은 4명도 안되거든. 그런데 텔레비는 4개 회사가 4백만 대를 만들고, 또 사는 놈도 몇 백만이나 된다. 예술이라는 게 본래 생활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이 많이 진보되면 보통 오락으로는 성에 안 차니, 그때부터 고도의 물건을 찾는 것이지. 취미의 고급이 예술 시장인 셈이야’
백남준은 어쩌면 예술에 대해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경영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예술가든 예술로 ‘생활’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다 보면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뉴욕의 한 전시장에서 만난 한국인 젊은 화가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작품을 싸게 팔고 개막식 파티를 많이 찾아 다녀야 하며, 여행을 많이 다니되 작품과 함께 다니라”
이 말은 ‘예술로 생활까지 해결해 나가야 하는’ 후배 예술가에게 자신이 터득한 ‘비법’을 전수해 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죠.
‘예술로 인생을 살아가는 일’이 험난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그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이렇게 말했답니다.
“재수가 좋아야 돼”
대가의 말치고는 너무 뜻밖이죠? 하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로 들립니다. 인생에는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도 많으니까요.
그의 말을 듣다 보면 인생을 ‘흐르는 물’처럼 여기는 천재 예술가의 ‘탈속의 경지’를 감지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도 그는 ‘지금 무엇이 제일 하고 싶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연애’라고 답했다는 군요. 예술가다운 발언이죠.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천재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나 천재 아니야, 바보야 바보, 미친 놈”이라고 했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병’이 나으면 ‘연애’를 할 것이라고 말했고, 젊은 여자들이 보고 싶다는 말도 했답니다. 늘 곁에서 헌신적으로 병간호를 해오던 ‘뚱보 아내’가 들으면 너무 서운한 말들이겠죠.
하기야 같은 비디오 아티스트였지만 백남준의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본 그의 일본인 아내는 “그가 쓰러지고 나서야 진정한 허니문이 온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연애 활동’은 왕성했다죠. 오죽하면 그의 부인이 ‘모든 통장을 압류할 정도’였지만 그는 연애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무한히 얻어낸다는 주장을 했답니다.
그들의 ‘결혼이야기’도 꽤 사연이 있더군요. 동경대학출신인 백남준이 ‘금의환향’식으로 일본 동경에 공연하러 왔을 때 지금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는 ‘백남준과 결혼할 결심’으로 의도적으로 접근했고, 그를 따라다닌 지 14년 만에 드디어 ‘웨딩마치’를 울린 집념의 여인이었답니다.
45세에 만혼을 한 그는 “시게코가 불쌍해서 결혼해줬다”고 말했다는군요. 드라마같은 '결혼 이야기'죠? 만혼이어선지 예술인 부부여선지 몰라도 슬하에 자식은 두지 않았다고하는군요.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그의 아내는 “이제 내가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 저 사람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헌신적으로 남편을 보살펴왔다고 합니다. 백남준으로서는 말년에 ‘처복’을 누린 셈이라고나 할까요.
서울 토박이인 그는 조국을 떠난 지 30여 년만에 귀국했지만 ‘깍쟁이 같기도 하고 정겹게도 들리는’ 서울말씨를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그는 서울에서 보고 싶은 사람으로 작은 누이를 꼽으면서 “백영득이 못 본 지 오래됐어. 다리가 아프대, 뼈다귀가 부러졌다고”라고 했답니다.
생전에 그는 ‘영어로 자서전을 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이루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 74세로 영면한 그는 생전에 ‘한 팔십까지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는데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것 같습니다. *
(백남준 어록)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게 예술이죠'[2]
'인생 자체가 예술'
'예술가는 절반은 재능이고 절반은 재수'
'표현은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 예술은 인간의 배설적 행위이기 때문에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게임에서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꾸라고 가르쳐준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
'영혼의 신비한 새인 소문은 호모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최초의 라디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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