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믹(?)홈드라마 ‘애정만만세’ 와 김수현 최후의 멜로물이라는
‘천일의 약속’
만추(晩秋)! 왠지 가슴이 시린 듯하다고 여기시는 분들 주변에 꽤 많아 보인다. 더구나 요즘 국내외 정세도 좀 이상해지고 있어서 말이다. 전세계적으로 기상 이변에 미국 동북부는 130년만에 대폭설, 방콕은 홍수에 도시가 침수당하고... 시리아 대통령은 죽어도 못 물러난다고 악다구니 중이고...미국과의 FTA를 놓고 대한민국 여의도에선 무시무시한 상황이 개봉 박두하고...
그날이 그날인 평범한 시민들, 보통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빠’ 우아한 주말레저를 즐길 여유가 없다. 그러니 가슴 한 가운데를 싸늘해진 가을바람이 휑하니 휩쓸고 가도 위로받을 시공간이 그리 넓지 않다. 그저 그만그만한 구조의 아파트 거실에서 말도 안 되는 TV‘주말 드라마’를 보는 것이 대체적인 대한민국 보통사람들의 일상일 것이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단지 ‘볼 만한 드라마’가 당최 눈에 띄지 않아 TV를 켜 놓은 채 딴 일을 하곤 한다. ‘볼 만한 주말 드라마’가 없는 주말은 보통사람들에겐 조금은 짜증나는 상황이기도 하다.
주말드라마 속에 빠져 자신의 일상(日常)에서 잠시 일탈(逸脫)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건 그나마 ‘견디기 따분한 일상’의 양념 같은 시간이기도 하다
‘드라마 공화국’으로도 불린다는 대한민국의 드라마 주요 소비층을 할 일 없는 ‘아줌마 부대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예전엔 나도 드라마는 주로 일 없는 여인네들이나 보는 허접한 것이라는 생각을 약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오히려 어떤 경우 고관대작이나 학자층 남정네들의 ‘드라마 몰입도’는 여인네들보다 월등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의 믿거나 말거나 수준으로 그 '높은 어르신'들의 드라마 선호는 상상초월의 수준이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빼고 다 해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관운이 억세게 승승장구했던 한 정치인이 ‘겨울 연가’를 보다가 “울었다”고 말하는 걸 보고 청력좋은 내 귀를 의심했던 적도 있다.
요즘 안철수라는 ‘천적’을 만나 다소 고전하고 있다는 박근혜님의 부친 박정희전대통령도 청와대 시절 드라마를 보다 눈물을 흘리는 일이 종종 계셨다는 말을 근혜님 여동생 근령씨로부터 전해 듣고 엄청 놀랐던 순간도 있었다. 틀림 없는 실화(實話)다.
‘드라마’는 그만큼 우리 팍팍한 일상생활 속에 파묻혀 있던.‘감성(感性)’을 일깨워주는 마음의 정화제 같은 역할을 해오고 있는 소중한 문화 코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대한민국 드라마는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꽈배기’ 같은 구도와 약방의 감초처럼 ‘반드시’ 끼어드는 ‘출생의 비밀’ 그리고 청출어람의 불륜 코드.
이런 심란한 것들을 ‘정상적인 생활 방식’처럼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정도가 셀 수록 ‘시청률’에 큰 영향을 준다는 걸 ‘신봉’하는 방송작가들의 괴상한 맹신 덕분에 우리 드라마소비자들은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온갖 플롯으로 정서적 폐해를 받게 된 것이다.
몇년전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간암으로 타계한 드라마작가 조소혜는 임종을 앞 둔 순간에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보다 시청률 낮게 나왔다는 소리가 더 괴로웠다"고 고백해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마 그런 한맺힌 스트레스가 그녀를 치명적인 암에 걸리게 했을 것이리라.
어제 한 착한 시청자는 방영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천일의 약속’이라는 드라마에 대해 작가에게 "천일의 약속을 보고 싶어도 말이 너무 거슬려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청자 소수의 의견도 들어줬으면 감사하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당사자인 김수현 작가는 이런 식으로 '성의껏 대답'했다는 것이다.
“내 말투가 이상하고 거슬리니 고쳐달라는 어느 분이 있는데 40년 넘게 그 말투로 일했고 그 말투가 바로 김수현이니 어떡하나요. 그냥 외면하고 편해지라 했습니다"라고 트위터에 올렸다고 한다.
한국 'TV드라마계의 여황제]라는 이 69세의 노작가는 종종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젊은 시청자들과 ‘소통’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은 있다.
"그렇게 힘이 들면 김수현 드라마를 외면하는 방법이 있어요. 나한테 말투 고치라는 건 가수한테 딴 목소리로 노래하란 겁니다. 그건 불가능해요. 내 대사가 바로 김수현이니까요"라는 글을 게재했다는 뉴스를
좀 전 인터넷 뉴스에서 봤다.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엄청 착한 사람같다. 우리가 듣기엔 영 불편한 답변인데.... 이런 오만함이 넘쳐보인는 ‘작가의 답변’을 ‘성의껏 대답했다’고 기사로 썼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드라마 1회당 3천만 원이 넘는 ‘집필료’를 받고 있는 ‘톱스타 작가’여선지 몰라도 김수현이라는 노작가는 ‘세살 버릇 여든간다’는 속담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거의 언제나 ‘시청자를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기벽(奇癖)의 소유자’같아 보인다.
얼마 전 작고한 스티브 잡스가 “남의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천재적 DNA의 소유자”라는 기사가 떠오르면서 혹시 김 작가 역시 그 ‘천재적 DNA의 소유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노작가’의 드라마를 언제부터 안 봤는지 잘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오래 전 그녀의 드라마는 안 본 나로선 그 ‘선량한 시청자’의 애달픈 하소연에 백 프로 공감한다.
김수현의 드라마엔 왜 그렇게 신경질적이고 화만 내는 성격파탄자들만 단골로 나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의 드라마를 ‘끊은’ 나로선 그 ‘여린 시청자’의 하소연에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미모의 젊은 여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어쩌구 저쩌구한다는 이 드라마는 김수현표 드라마답게 첫회 첫 신부터 ‘짙은 베드신’으로 화제를 모았다는 보도를 보고 그녀의 드라마를 일찌감치 “끊기 잘했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했다. 대개 그 시간대엔 미성년 자녀들과 함께 TV를 보는 집들도 적잖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쓰다 보니 <한 노작가의 ‘개인적 성격’이 드라마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문을 쓰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혼자 피식 웃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원로작가’의 성품이나 그녀의 드라마 수준에 대해 인신공격적 ‘비판’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대한민국에선 아직까진 제일 잘 나가고 있다는 이 ‘할머니 드라마 작가’의 끝간 데를 모르는 ‘잡스 스타일’ 성격이 ‘위로가 필요한 이 시대’와는 영 방향이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아무래도 ‘타고난 성격은 죽어야 고쳐진다’는 속담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옛말 치고 틀린 말 별로 없다는 소리도 여기에 해당하는 것 같다.
아무튼 ‘드라마 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주말 드라마든 주간 드라마든 볼만한 게 거의 없다는 이 ‘우울한 현실’에 다소 짜증이 나고 있는 중이다. 예전엔 주말 황금시간대의 드라마들은 웬만하면 괜찮았다. 그런데 작가들 실력이 하향평준화 되었는지 아니면 시청자 안목이 상향평준화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청률 높다’는 드라마들까지도 보기 민망한 시추에이션이 우후죽순으로 앞 다퉈 나오고 있는 현실이 걱정스러울 정도다. 드라마의 하향평준화는 시청료가 아깝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어제 잠깐 본 ‘애정만만세’라는 드라마 역시 그런 ‘막장부류의 주말 드라마 같다. 어제가 32회차라니 꽤나 진행중인 드라마다. 앞서 몇 번 보다가 눈살찌푸릴 대사와 행동이 속출해 ’끊었던‘ 드라마다.
지난 주인가, 어린 소녀가 엄마와 이혼한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아빠의 서재에서 책을 보는 장면이 나왔다.
곧 이어 딸을 데리러 방에 들어온 엄마는 악을 쓰면서 그 책을 찢는 게 아닌가. 지금까지 숱한 드라마를 봐왔지만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거의 ‘진시황제 분서갱유 스타일’의 액션은 보다보다 처음이다. 더구나 아빠도 아닌 엄마가. 어린 아이들이 있는 집에선 목불인견의 장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쓰는데 저렇게 패악한 장면을 보여주나 싶어 ‘작가 검색’을 했더니 50대 초반의 ‘명문여대’출신의 베테랑 작가로 소개되어 있다. 제목마저 신파적인 ‘애정만만세’를 회당 2500만 원 이상 받고 쓴다는 ‘특A급’ 작가라고 한다. 맙소사.
그 드라마 홈피에 들어갔더니 이런 기획의도가 적혀있다.
<기획의도>
대리만족을 주는 통쾌한 석세스 스토리! 결혼 6년... 믿었던 남편으로부터 희대의 사기이혼을 당하고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진 주인공 강재미. 그녀의 밑바닥부터 출발한 고군분투 성공기를 지켜보며 잠시나마 우울한 현실을 떠나 대리만족을 느끼는 희망 드라마. 만인이 공감하는 생활밀착형 드라마!
세계 1위의 이혼율을 자랑하는 이혼왕국 대한민국! 이제 이혼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이혼으로 인한 상처와 극복과정을 본격적으로 다툼으로써 주인공=나 라는 공감으로 그녀를 응원한다. 따라서 구경하는 소극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적극적인 흡인력을 이끌어낸다.
기획의도만큼은 ‘일류' 같아 보인다. 통쾌한 석세스 스토리에 고군분투 성공기, 희망 드라마, 생활 밀착형 드라마라니 이보다 더 좋은 수사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몇 번 이 드라마를 보다보니 이렇게 허황하고 장안의 이혼녀는 죄 등장시키려는 듯 등장인물마다 거의 모두 ‘이혼녀’든지 아니면 ‘출생의 비밀’을 간직한 ‘사연 많은 사람들만 보여주는데 그저 아연실색이다.
‘토씨’만 우리말을 쓰고 나머지 단어는 ‘베이비 ’베리 굿타임‘ '굿 잡걸’ ‘시추에이션’ ‘디보스’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영어단어를 말끝마다 쓰는 자수성가 재벌녀 (김수미분)의 황당한 행동에는 그저 할 말이 없어진다. 그 재벌녀는 왕년에 장마당에서 유랑극단처럼 떠돌았다나 어쨌다나...아이고,
더구나 이혼전력을 말하지 않고 금이야 옥이야 기른 ‘골든 베이비’ ‘마이 썬’과 결혼하려는 응큼한 ‘굿 잡 걸’의 사연에 황당해 하며 키 큰 ‘마이 베이비’의 뺨을 후려치려 깡충 튀어오른 ‘잉글리시 마미’, 재벌엄마의 행동은 가히 ‘코믹 홈드라마’의 압권으로 꼽을 만하다.
총각조카가 이혼녀와 결혼한다는 걸 알고 ‘광분’하는 정체불명 ‘이모’의 언행도 수준급 코미디다. 아무튼 잠깐 본 이 ‘애정만만세’에서 거의 유일하게 순수하게 웃기는 장면은 일곱 살짜리 유치원소녀 ‘남다름’양의 ‘홀아비아빠’ 재혼시키기 작전수행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도 너무 ‘과대포장’하려는 걸 보면서 유쾌했던 웃음이 억지웃음으로 변해버렸다.
‘먹기는 쉬워도 만들기는 어렵다’는 말처럼 우리 집 마루에서 다리뻗고 편안하게 보는 드라마들을 놓고 이런 식으로 왈가왈부하는 ‘못된 시청자’ 노릇이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이다. 그 드라마 작가들이야 “뼈를 깎는 고통 속”에 하얗게 밤을 새워가면서 써놓은 대본 일텐데 괴팍한 시청자 한 사람이 ‘단칼’에 그들의 예술적 소양이나 작품성에 흠집을 마구 내는 것도 사실 그리 예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왕‘이라는 말도 있듯이 ’드라마 소비자‘인 우리가 이 정도의 의견 표출을 한다는 건 그리 ’경우‘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온갖 ‘불륜 백화점’에 ‘몬도가네 식’ 출생의 비밀을 암시하기 위해 툭하면 꺼내드는 배냇저고리 보는 것도 우습다 못해 지겨워진다.
드라마 대강의 줄거리를 좇아가다보니 코믹 홈드라마라는 ‘기획의도’와는 영 딴판의 엽기 불륜치정의 무늬만 홈드라마(여기에 홈을 꼭 붙여줘야 하는지는 의문.)를 주말 황금시간에 배치한 방송사의 ‘배려’에 그저 황망할 따름이다.
*PS-이 드라마들을 재밌게 보시는 분들에겐 죄송한 마음을 먼저 전하고 싶다. 취향의 문제라는 걸 덧붙여 말씀드리며 양해를 구한다. 아무튼 개인적으론 이런 이상한 드라마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를 황폐화시키는데 일조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드라마가 꼭 도덕교과서 같아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요즘엔 초등생들도 이런 드라마를 아주 ‘재밌게’보고 있다는 사실을 작가님들이 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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