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 클린턴과 친정엄마 도로시여사의 모전여전 강인함-
"엄마는 내가 대통령이 되는 걸 원하셨다"
- 모친 故 도로시 여사의 가정교육이 결정적 영향-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모친상을 당했다. 미국 시각으로 11월 1일 새벽 세상을 떠난 ‘친정엄마’ 도로시 하월 로덤(Rodham) 여사는 역시 ‘보통엄마’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학식이 높거나 뛰어난 경력의 ‘커리어 우먼’이라는 말은 아니다. 외려 학력은 별 내세울 게 없었지만 '어머니의 지혜'로 인생을 슬기롭게 살아내는 방법을 가르친 그저 평범한 어머니였다.
고인(故人)은 어린 시절 결손가정환경에서 갖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며 특유의 생활력을 키워온 '자수성가형' 여성이었다. 20세기 중반, 여성과 흑인에겐 여전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상황에서도 ‘경제적 자립’을 위해 늘 ‘일하는 엄마’로서 모범을 보여 왔다.
1919년 6월 소방수의 딸로 시카고에서 태어난 도로시 여사는 어린 시절 온갖 역경과 외로움의 큰 상처를 겪었다. 도로시 여사가 8세 때 그녀의 부모는 이혼했다.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주의 조부모 밑에서 자랐으며, 14세 때 가정부 자리를 얻어 자립했다.
도로시 여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 교육을 받는데 도움을 주겠다”는 모친의 약속에 따라 다시 시카고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한 사무실에서 일자리를 얻어 스스로 생활해야 했다. 고인은 시카고에서 여행 판촉 일을 하던 휴 로댐을 만나 1942년 결혼했다. 부부는 외동딸 힐러리와 휴, 토니 두 아들을 두었다.
힐러리는 시카고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딸답게 어린 시절부터 ‘독립심’이 강했다. 예쁘고 총명하고 ‘드높은 야망’까지 갖춘 딸아이를 지켜보며 대부분 ‘시카고 엄마’들이 그렇듯 힐러리의 친정엄마 역시 ‘총명한 딸’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했다.
로덤 여사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우리 딸아이는 8세 때부터 자신의 일은 모두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할 정도로 자립심이 강했답니다. 정말 무서운 애였죠”라고 말했다. ‘무서운 아이’라는 말처럼 ‘등급 높은’ 자식자랑 수사법은 찾아보기 드문 것 같다.
도로시 여사는 총명한 딸에게 항상 영감(靈感)을 불러일으켜 준 ‘정신적 지주’로서, 평범한 어머니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큰 산’같은 존재였다. 힐러리가 남편 클린턴의 바람기로 ‘참을 수 없는 모욕’의 시간을 견뎌내는데도 ‘친정엄마’의 ‘옛날이야기’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모녀의 이야기는 마치 우리네 예전 할머니와 어머니세대의 ‘인고(忍苦)의 세월’ 이야기와 상당히 비슷하다. 여자란 존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아야 하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도로시 여사는 1999년 ‘대통령 사위’ 빌 클린턴이 잇따른 섹스 스캔들로 딸의 속을 엄청 썩였을 때도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통해 딸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내 딸은 감정이 섬세하지만, 감정에 지배당하지는 않아요.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내 앞에서조차 남편과의 사생활을 시시콜콜 늘어놓지 않습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도로시 여사는 힐러리가 어렸을 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힐러리 클린턴의 외조부모는 그녀의 엄마가 여덟 살 때 이혼했다. 말하자면 결손가정의 어린이가 된 셈이다. 이제 겨우 8세밖에 안된 어린 소녀였지만 도로시는 세 살배기 동생 손목을 잡고 단둘이 시카고에서 로스앤젤레스 할머니 댁까지 사흘간 기차를 타고 가야했다.
이런 얘기를 딸에게 들려주자, 힐러리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눈물을 글썽이며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런 친정엄마의 '슬픈 유년시절’이야기 덕분인지 힐러리 클린턴은 이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자랐다는 것이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 같다.
1920년대 중반 미국은 지금처럼 세계 최강대국도 아니었고, 경제적으로 풍요가 넘치는 시절도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대공황’이 일어나기 직전이어서 사회적으로 모든 게 어수선한 시대였다. 그 와중에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 오뉘가 사흘 밤낮을 흔들리는 기차 칸에서 보내며 ‘머나먼 LA’까지 가야하는 ‘애처로운 정경’은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도 울컥하는 심정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어린 힐러리는 엄마의 유년시절 이런 ‘고생담’을 들으며 몹시 가슴아파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가정적 환경’이 힐러리를 동양적 ‘현모양처(賢母良妻)스타일’로 만든 것 같다. 내 주변에서도 모친과 여동생들이 잇따라 이혼한 경력이 있기에 자신만은 '절대'로 이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여성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집안의 딸이다. 그러니 이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인고의 세월'을 보내왔다는데 지금 보면 그녀의 '참아냄'이 오히려 그녀를 지켜준 버팀목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 이혼 경력 3회'소유자로 유명한 한 여류 소설가는 자신의 딸아이에게 "잘 헤어져 줄 줄 아는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가정교육'을 시켜왔다는 말을 매스컴에 나와 스스럼없이 해 충격을 주었다. 언젠가 그녀는 자신이 재혼하면서 '데려간 자식'이 새 남편의 성을 쓰지 못하게 하는 '법의 횡포'에 '분노'했다는 류의 글을 신문에 기고했던 적도 있다.
요즘에야 가족법이 개정돼 그녀의 그런 '분노'는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혼'은 남의 사생활이긴 하지만 '이혼장려 발언'으로 오해할 법한 말을 대중을 향해 마구 쏟아내는 그녀는 요즘 '트위터계의 전사'로 진보정치 활동을 한창 겸업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그런 거칠 것 없는 '페미니스트' 여류소설가들이 볼 때 '참고 살아온' 힐러리의 '인고의 결혼생활은'어쩌면 경멸의 대상일 지도 모르겠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와 비슷한 성향의 여성운동가들은 ‘르윈스키 스캔들’당시 힐러리 클린턴의 ‘대통령남편’을 지켜주려는 ‘언행’에 동정하기는 커녕 ‘권력욕으로 지탱하는 이상한 부부관계’로 폄하했었다. (원 남이 이혼 안하는 걸 문제삼는 그 경박함은 뭐라 평가해야할지...)
하지만 힐러리와 절친한 주변 몇몇 인사들은 그들 부부가 단지 ‘권력의 끈’으로만 이어진 ‘무늬만 부부’는 아니라는데 견해를 같이 했다. 클린턴은 힐러리에게 몹시 의존적이었으며 언제나 힐러리의 규율, 결단력, ‘맹렬한 헌신’등 그녀의 성격적 ‘장점’을 어린애처럼 좋아했다고 한다. 세상 어느 부부들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금과옥조’가 있다. ‘부부 사정은 그들 두 사람만이 아는 법’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힐러리 클린턴은 소녀시절부터 ‘이혼은 절대 금물’이라는 환경 속에 자라온 ‘덕’을 봤다고 할 수있다. 그 이전까지는 별로 인기 없는 퍼스트레이디였지만 ‘대통령 남편’의 못말리는 바람기를 끝내 참아내고 ‘가정’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오늘의 현주소’가 마련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혼 잘 한다는' 미국인들도 '참고 사는 아내'의 편을 들어준 거 같다.
결국 힐러리의 이런 ‘超인내심’은 ‘친정엄마’ 도로시 여사의 ‘가정교육’덕분이라는 말과도 맥이 통하는 얘기다. 워싱턴포스트(WP)는 2008년 미국 대선 민주당 후보 선두주자였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대권 도전에 나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바로 ‘친정엄마’ 도로시 여사라고 전했다.
당시 WP는 ‘어머니의 힘, 후보의 야망’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통해 도로시 여사가 딸 힐러리에게 미친 영향력을 분석했다. 아버지의 외모를 닮은 힐러리는 어머니와는 ‘모녀지간’같지 않을 정도로 다른 얼굴이다. 하지만 어머니 도로시 여사는 딸의 성장과 가치관 형성, 대권 도전 야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힐러리 자신도 민주당 토론회에서 대권 도전에 나서게 된 결정적 계기를 묻는 말에 “개인적으로는 어머니 때문이다. 엄마는 대학에 갈 기회도 없었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내가 결심한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나에게 주셨다”고 말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그들이 이뤄내지 못한 ‘꿈’을 ‘딸들에게서 이뤄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동양의 어머니들 그 중에서도 한국의 ’극성엄마들‘에게선 이런 ’열정적 기질‘은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기본'이니까 말이다.
대개의 미국 엄마들이 ‘자유방임형 자녀 교육’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힐러리의 친정엄마는 한국 엄마들처럼 “우리 딸이 제일 잘 나가”를 맹신하던 극성 맹렬 엄마였던 게 분명하다.
유년 시절 힐러리가 이사 간 동네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울고 돌아오자, “겁쟁이는 우리 집에 들어올 수 없다. 애들이 때리면 너도 맞서 때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일화다.
故人은 평소 대중 앞에 잘 나타나지 않았고 언론과 특별한 인터뷰도 하지 않았지만, 딸이 역경에 처했을 때에는 늘 결정적인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어머니의 그 딸! 母傳女傳의 ‘강인함’이 미국 퍼스트레이디 역사상 최초로 힐러리 클린턴을 상원의원에 당선시켰고, ‘대통령 남편’에 뒤이어 ‘대통령 직’에 도전하는 ‘신화’를 썼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오늘 밤 64세 ‘여장부’ 힐러리 클린턴은 93세 ‘친정엄마’를 여의고 몹시 상심(傷心)에 빠져있을 것이다. 자식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엄마의 영원한 아이’인 것이기에 엄마 잃은 ‘아이’는 눈물밖에 남은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힐러리 장관님 힘내세요. 호상(好喪)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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