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사진)
[연평도 포격 1년…]
'나라 위해 피흘린 청춘들,눈물흘리게 하지말라'
『연평도 포격 1년 - 국가를 지켰고, 국가가 외면했다… 부상자들의 서러운 오늘.
높은 분들 줄줄이 찾아와 "걱정마, 책임진다" 장담, 영웅이라고? 다 말로만…
오른팔 망가진 김명철씨 등 그때 연평도의 부상병들, 국가유공자 신청에 묵묵부답
"내 몸에 남은 파편 3개, 그래도 내게는 소중한 훈장… 국가가 날 모른 척하더라도"
"내 오른쪽 무릎 아래 신경 죽은 날, 태권도 사범 꿈도 죽었다"
위 기능 3분의 2 잃은 김진권 - 매일 소화제 3~4알 먹어야,
골반뼈 이식해 복구한 오른발 발가락 달라붙은 오리발 같아
4㎜ 때문에 우는 박봉현 - 잘라낸 무릎 연골 6㎜, 10㎜ 안돼 유공자 못 돼
매일 밤 가위 눌리는 김지용 - 목·허벅지 등 온몸에 파편, 큰 소리 들으면 벌벌 떨어
심리치료 받는 김용섭 -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죽은 동료 보여 힘들어』
오늘 아침, 청춘은 아니지만 ‘청춘처럼’ 피가 끓어올랐다. 위의 글을 보면서 울분을 느끼지 않을 대한민국 국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아침신문에 실린 ‘피흘린 청춘들, 눈물 흘리게 하지말라’는 기사는 ‘청춘의 정의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연평도 포격 1년이 흐른 지금,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 흘렸던 ‘그날의 해병용사들’이 푸대접 받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럴 수는 없는 법인데... 기사 내용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떤 병사는 ‘잘라 낸 무릎 연골이 10mm 가 아닌 6mm 여서 유공자 대우를 못 받는다고 했다. 지금 개그 콘서트 하는가.
우리 국민이 후방에서 편안히 지내는 동안 그 젊은 해병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피흘리며 쓰러져 갔다. ‘나약한 애들’이라고 걱정했던 우리의 아들들은 적의 기습도발에 침착히 대응해 온 국민을 감동시켰다. 그런 그들을 국가가 소홀히 대한다는 건 ‘남의 집 아들’얘기라도 분하다.
대한민국이 세계 12위권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도 ‘튼튼한 안보’덕분도 컸는데...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당장 적의 도발을 막아낸 병사들의 아픔을 소중히 보듬어 주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북괴가 느닷없이 연평도에 포탄공격을 하던 그날, ‘후방’에서 매스컴을 통해 불길 치솟는 연평도 마을 현장의 뉴스화면만을 보면서도 굉장히 공포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물며 포탄이 바로 코앞에 떨어지는 ‘전장(戰場)’에서 우리 젊은 해병들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공포와 고통은 어떠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날, 우리의 젊은 해병들은 용맹무쌍했다. 누가 우리 젊은이들을 ‘나약한 애들’이라고 했는가.
그들은 조국을 위해 자신의 철모가 불붙는지도 모른 채 대응 사격에 온 힘을 다 했다. 젊은 병사들은 공격당한 지 5분 만에 응사(應射) 준비를 마쳤지만 반격 명령이 떨어지기까지 8분이나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한 해병은 그 8분이 지옥의 시간이었다고 울먹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적의 포탄이 빗발치는 와중에 8분간이나 손 놓고 있어야 했다는 건 어떤 수사법을 동원해도 그려내기 힘든 공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전쟁터에선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엇갈린다는 건 기본 상식이다. 이건 뭐 꼭 전쟁을 직접 겪어본 사람만 아는 건 아니다. ‘생사의 갈림길’이 0.5초 사이에 갈렸다는 소리를 한 두 번 들었는가 말이다.
우리 젊은 해병들은 그 열악한 전투상황에서도 치열하게 응전했고 적을 물리쳤다. 그 와중에 조국을 위해 꽃 같은 생명을 바친 병사들도 있었고, ‘평생 장애’를 입고 아직도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는 부상자도 16명이나 나왔다.
사건 직후 그들이 입원한 군병원에 줄줄이 문병 왔던 정부와 정치권 인사들은 “나라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지만 결국 정치적 립서비스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공수표’를 발행했다는 얘기다. 이래가지고 돌아선 ‘청춘들의 마음’을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는가.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결과가 그저 재수 없어서 당한 개인적 ‘손해’로 그치고 말았다면 어떤 젊은이가 조국을 위해 총을 들겠는가.
오늘 아침 조선일보 1면 톱을 장식한 “피흘린 청춘들, 눈물 흘리게 하지말라”는 기사는 숙연한 마음이 들게 한다. 가뜩이나 ‘불안한 청춘들’에게 그나마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조국이 그들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영혼이 너무 가엽지 않은가.
제발 정치권 인사들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지 말았으면 좋겠다. 비단 오늘 소개된 이 ‘연평도 해병용사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을 때 국가는 끝까지 책임져준다는 걸 보여주길 간절히 바란다.
* 아래 오늘 조선일보 1면과 2면에 실린 기사를 소개한다*
지난해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은 해병대 일병 김명철(21)씨의 오른팔을 망가뜨렸다. 해병 출신 외삼촌들을 보고 자란 김씨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해병대에 자원했었다. 김씨는 파편으로 인한 부상 직후 골반뼈를 오른팔로 이식하는 재건수술을 2차례나 받았다. 지난 8월 의병 제대했지만, 심각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다.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질 때가 많다
아버지 김경수(50)씨는 "수도병원에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갔더니 상이 등급 올리려고 왔느냐고 묻습디다. 이게 나라 위해 싸운 장병한테 할 말입니까. 이게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명철씨의 오른팔은 근육을 크게 들어냈다. 재활중인 근육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않아 명철씨는 아직도 오른팔로 볼펜 글씨를 똑바로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국군수도병원 입원 초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찾아오는 정치인들과 정부 고위 인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쳤으니 당연히 국가 유공자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명철씨는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전역 직후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정부에서는 여전히 '심사 중'이라는 답변뿐이다.
최주호(23)씨는 배에 2개, 팔꿈치에 1개의 파편이 남아있다. 제거 수술이 어렵다고 해서 빼내지 않았다. 평생 이 파편들을 안고 살아야 한다. 파편은 옆구리를 관통해 위와 장, 십이지장을 헤집었다. 오른쪽 콩팥을 떼어내야 했고, 십이지장도 일부 잘라냈다. 비오는 날에는 파편이 박힌 팔꿈치가 쑤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부산 신라대 체육학과 2학년에 복학했지만, 조금만 무리한 운동을 해도 연평도의 파편들이 그를 주저앉힌다.
그래도 그는 그날 연평도에서 해병이었던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제 몸 속에 남아있는 파편 3개는 훈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전선에서 해병으로 복무하며 나라를 지킨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날 연평도에서 적의 포탄에 부상을 입은 해병대 병사들이 잊혀져가고 있다. 정부는 국가유공자 지정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아 부상자들을 서럽게 하고 있다. 부상 당시에 입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일상 생활이 어려울 정도지만, 그들은 여전히 해병이었다. 조국을 위해 싸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연평부대 정비소대 일병으로 복무하던 김진권(21)씨는 포탄 파편을 맞고 위장 기능의 3분의 2와 오른쪽 발등을 잃었다. 거의 형태를 잃은 오른쪽 발은 골반뼈를 이식해 복구했지만, 발등 부분이 움푹 패어있고 발가락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는 오리발 같은 모양이 됐다.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타야 한다.
종일 누워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전부다. 지난 6월 상병으로 의병제대한 뒤 10월에야 서울대병원 에서 퇴원했다. "매일같이 3~4알의 약을 먹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라며 "이렇게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중화기 중대 병장으로 전역한 김지용(22)씨는 거의 매일 밤 포격 당시의 상황이 떠올라 가위에 눌린다. 포탄 파편에 목과 오른쪽 손, 발가락, 허벅지 등에 상처를 입었다. 국군수도병원에 3개월 입원했다가 지난 2월 퇴원했다. 아버지 김영식(51)씨는 "아직도 큰 소리가 나거나 총소리 비슷한 소리를 들으면 그때의 기억이 때문인지 다 큰 아들이 벌벌떤다. 그걸 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지용씨는 국가유공 상이등급 7급을 받았다. 가족들은 "포격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나 정부에서 최고 대우를 해준다고 하더니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말했다. 지용씨 가족은 상이등급 재심을 신청할 예정이다. 아버지 김영식씨는 "연평도 피해자에 대한 국가유공자 기준치가 상식에 맞지 않는다며 대통령에게 탄원서도 제출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며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연평도 포격 사상자 18명 전원을 유공자로 대우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힘찬 구령소리와 함께 날렵한 발차기를 날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태권도 사범은 이민욱(19)씨의 오랜 꿈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작년 4월 19일 해병대에 입대한 이씨는 실력(태권도 4단)을 인정받아 연평도 정비소대에 근무하며 태권도 조교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그의 꿈은 완전히 멈춰섰다. 오른쪽 다리는 무릎 아래쪽 신경이 죽어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다리를 들면 발목이 축축 처진다.
9살 위 큰형의 해병대 군복이 멋져 보여 해병대에 지원한 김용섭(23)씨는 포격 당시 오른쪽 허벅지에 파편을 맞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만기 전역했다. 김씨도 마음을 다쳤다. 어머니 이을순(52)씨는 "아들이 술이라도 한 잔 하는 날에는 '죽은 동료들이 보인다'며 힘들어해 부산 보훈병원에 가 심리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서재강(23)씨는 지난해 11월 연평도 포격 당시 오른쪽 다리에 파편 3개가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경북 포항의 해병대 1사단 수색대에서 근무하다지난해 11월 훈련을 위해 연평도에 들어왔다 북한의 포격에 다쳤다.
연평부대 일병이었던 박봉현(22)씨의 어머니 하상운(53)씨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면서 울먹였다. "진정한 남자가 되겠다"며 늑막염 치료까지 받으며 해병대에 자원했던 박씨는 연평도 포격으로 인해 십자인대와 무릎 연골이 파열돼 지난 2월 의병 전역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권 인사들은 아들이 후송된 성남 국군수도병원으로 찾아와 박씨와 부모들의 손을 부여잡고 말했다. "나라를 위해 복무하다 다쳤으니 국가가 책임집니다. 아드님은 영웅입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수술 뒤 받은 신체검사에서 유공자 기준 미달 판정이 나왔다. 기준상 잘라낸 무릎 연골이 10㎜가 넘어야 하는데 박씨가 잘라낸 연골은 6㎜에 불과하다는 이유였다. 하씨는 "이제 22살 한창 나이인데도 뛰지도 못하고, 무거운 물건을 들지도 못해요. 심지어는 산에도 못 갑니다. 4㎜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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