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에서 힐러리 클린턴장관.(다음뉴스사진)
‘야망의 여걸’ 힐러리 클린턴 미국무부 장관이 자신의 딸 첼시에겐 ‘아수라장 정치판’에 입문하는 걸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힐러리는 며칠 전 필리핀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 기자가 딸 첼시에게 정치를 권하겠느냐고 질문하자 “딸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정치를 추천하지는 않겠다. 정치를 하려면 코뿔소의 피부가 있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처받기가 굉장히 쉽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코뿔소의 피부’란 꽤 흥미로운 은유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뻔뻔하고 유들유들한 처세’라고나 할까. ‘정치한다는 건’ 미국이든 한국이든 국적불문하고 여간한 배포 없이는 하기 어려운 직업인 듯하다.
‘대를 이어 가업을 잇는 풍토’가 대세인 일본에선 대체로 정치인 자제들은 부모의 지역구를 물려받는 행태로 정치판에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는 게 ‘대세’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일본에선 2세 3세 정치인들이 많다.
미국에서도 부시 가문이나 케네디 가문을 비롯해 정치를 가업으로 대물림하는 이른바 ‘명문 가문’들이 심심찮게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미 역사상 최초의 ‘부부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으로 알려진 클린턴 부부는 ‘외동딸’ 첼시만큼은 ‘험난한 정치인’의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지난 11월 16일 미국과 필리핀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60년을 기념하기 위해 필리핀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수도 마닐라에서 40~50명 정도 되는 시위대로부터 계란과 페인트 볼 ‘공격’을 받았다. 물론 차량 안에 있던 힐러리는 무사했지만 꽤나 놀란 듯하다. 그러나 ‘노련한’ 힐러리 클린턴 장관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사회자가 기습시위에 대한 의견을 묻자 “이런 일에는 익숙하다”며 “모든 사람은 다른 이들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고,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또 “필리핀은 매우 생기 넘치는 민주주의 국가”라며 “필리핀 국민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의 뜻을 표현하곤 한다”고 덧붙였다. 약간은 ‘가시’가 들어있는 말처럼 들린다.
그날, 타운홀 미팅’ 형식의 학생들과의 만남에서도 힐러리는 미군부대가 필요에 따라 필리핀 영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주둔군지위협정(VFA)에 반대한다며 목청을 높인 한 기습 시위자를 만났다. 어딜 가나 ‘반미(反美)’ 정서에 부닥친 힐러리로서는 마냥 여유로울 수만은 없었을 것 같다. 그렇게 힘든 ‘긴 하루’를 머나먼 타국땅에서 견뎌야 했던 그녀로선 하나밖에 없는 귀하디귀한 외동딸에게 ‘힘든 가업’을
이어달라고 말할 생각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낙천적으로 알려진 필리핀 국민들도 요즘은 세계적 추세인 ‘점거 시위문화’에 합류하는 분위기여선지
미국의 국무장관을 맞이하는 분위기가 영 썰렁했던 것 같다.
현지 방송사가 주최한 행사에서도 힐러리를 향해 시시콜콜한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핸드백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묻는 질문도 나왔다.
힐러리는 망설이지 않고 즉각 화장품과 블랙베리, 온갖 종류의 종이가 들어 있다고 답했다고 한다. 역시 노련한 정치인 다운 순발력을 보여준 것이다. 또 아이패드에 어떤 음악을 넣어 듣고 다니는지 묻자 클래식과 자신이 어렸을 때 즐겨 들었던 비틀스·롤링 스톤스·더 후·도어스 등의 음악이라고 말했다.
힐러리의 상관 오바마도 아이패드에 비틀스, 밥 딜런 등의 팝송과 클래식음악을 담았다는 점에선 비록 10여 년의 나이 차이는 나지만 미국의 대통령과 장관의 ‘음악적 취향’이 비슷한 것 같다. 오바마 정부 출범과 함께 국무부 장관직을 수행해온 힐러리 클린턴은 차기 민주당 대선 후보로 나설 것이냐는 질문에 단호히 부인했다는 뉴스를 며칠 전 외신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이제 내년이면 65세인 힐러리로서는 어쩌면 자신이 물러서야할 ‘시기’를 ‘직감’하고 그런 응답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남편’보다 더 똑똑한 퍼스트레이디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힐러리 클린턴장관이 자신의 딸에게 정치인의 길을 추천하지 않겠다고 발언한 것은 코앞으로 다가온 내년 ‘정치의 계절’을 앞두고 꽤나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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