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김환기 작품과 유심초 유행가를 탄생시킨 시 한 줄-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스카이뷰2 2012. 1. 15. 17:48

김환기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현대갤러리)

 

 

김환기 대표작과 유심초 유행가를 탄생시킨 시 한 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별 하나가 나를 내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그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저녁에 중)

 

 

짧은 시 한 구절이 다른 예술분야에 영감을 선사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 영감을 화폭이나 원고지, 오선지에 옮김으로써 '작품'이 나온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예술의 '탄생 신화'는 이렇게 이뤄진다.  유명 화가에게, 작가에게, 심지어 유행가 가수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시 한 구절이 한 시대를 밝히는 등대처럼 빛나기도 한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구절이 바로 등대처럼 ‘낭만적 예술의 요람’이 된 문장이다. 40년전 작고한 수화(樹話) 김환기 화백이, '광장'의 작가 최인훈이 희곡에 이 시 구절을 제목으로 차용했다. '예술적 영감'의 원동력이 된  한 줄의 명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한 화가가, 한 작가가, 한 유행가 작곡가와 가수가 한 문장으로 '작품'을 만들어  자신들의 대표작품의 제목으로, 또 유행가 가사로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다는 건 ‘20세기 최후의 낭만적 풍경’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하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딘지 느릿느릿하면서도 아득한, 그러면서도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의 간단치 않음을 함축하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 구절은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아련한 향수 같은 걸 느끼게 만드는 오묘한 매력이 있는 듯하다.

 

1980년대 유심초라는 쌍둥이 형제가수가 불렀던 유행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발표 당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단정하게 생긴 ‘일란성 쌍둥이’ 청년 둘이 나와 통기타를 치면서 불렀던 이 노래는 멜로디도 ‘쿨’하지만 특히 가사가 ‘심오하고 멋지다, 어딘지 철학적이다’라는 입소문과 함께 빅히트했다. 노래가 히트하기 전까지는 ‘정통 시’를 가사로 삼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지금처럼 인터넷천하가 아닌 시대여서 그 노래가사를 이산(怡山) 이라는 호를 가진 인텔리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로 만들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는 그리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그 무렵엔 TV 가요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웬만한 카페에 가면 유심초의 ‘사랑이여’와 함께 이 ‘어디서 무엇이~’는 단골로 흘러나오곤 했다.

 

‘분위기’를 중시하는 카페 풍 가요였다고나 할까. ‘정통 시’를 가사로 쓴 유행가 중 1960년대 유주용이라는 혼혈 가수가 불렀던 김소월의 ‘부모’와 이 ‘어디서 무엇이~’는 20세기 대한민국 유행가요 사상 제일 크게 히트했던 노래였던 것 같다.

 

요즘 서울 경복궁 근처 사간동에 있는 현대 갤러리에서는 ‘20세기 화가 김환기 회고展’이 열리고 있다. 요즘 신세대들은 ‘김환기 화백’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20세기’라는 표현을 쓰면 상당히 오래 전 시절 같지만 불과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20세기다. 그 시절엔 소위 ‘낭만’이라는 사치스런 단어가 그래도 좀 통용되던 시대였다.

 

1913년 전라남도 신안에서 출생,1974년 생을 마감한 김환기 화백’은 ‘대한민국의 피카소’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거장(巨匠) 화가’다. 대한민국 미술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화풍의 소유자다. 예전엔 중고등학교 미술 교과서나 은행에서 만드는 달력에 ‘단골 그림’으로 등장하곤 했다. ‘백자 항아리’에 붉은 꽃이 핀 가지들이 가녀리게 흐드러진 모습의 그림이나 푸른 점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박혀있는 신비한 푸른 빛의 군무 등이 그의 작품이다.

 

이번 회고전에서 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대표적 대작(大作)을 볼 수 있다. 가로 172㎝, 세로 232㎝의 대형 화폭이다. 신비한 푸르름이 압권으로 다가온다.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수상작인 그의 대표작이다. 김 화백이 쉰의 늦은 나이에 건너간 뉴욕에서 새롭게 도전했던 뉴욕시대(1963~1974) 신 화풍의 첫 그림이다.

 

이 작품을 보는 이들은 일단 아득함을 느끼기 쉽다. 가로 172㎝, 세로 232㎝의 대형 캔버스를 가득 메운 자잘한 점이 찍힌 푸른 사각형들의 군무(群舞)를 보면서 감수성이 좀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예술한다는 것의 고통스러움’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천형(天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처럼 조수(助手)를 채용하는 것도 아니고 화가 혼자서 일일이 저 수 만개의 푸른 점의 사각형을 그려나가야만 한다는 건 아득하면서도 진저리쳐지는 일이기도 하다. 문득 진주(眞珠)가 탄생하려면 조개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얘기가 오버랩 된다. 그래서 예술의 길은 험난하다고 했을 것이다.

 

김화백은 ‘친한 벗’이었던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에서 영감(靈感)을 얻어 이 작품을 탄생시켰다. 지독한 향수병(鄕愁病)에 시달리면서 뇌출혈로 세상을 뜨기까지 화가는 그리고 또 그렸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바로 수많은 점을 대형 캔버스에 찍어나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걸 상상해보라.

1970년에 쓴 일기에서 화가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친구의 편지에 이른 아침부터 뻐꾸기가 울어댄다 했다. 뻐꾸기 노래를 생각하며 종일 푸른 점을 찍었다." 뭉클해지는 문장이다. ‘종일 푸른 점을 찍으면서’ 화가는 예술하는 사람으로서의 고통을 삭혀야 했을 것이다. 예술이 뭔지 잘 모르는 우리네 일반인들도 그 그림을 보면 신비한 환상의 빛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김화백의 작품에는 정서적인 호소력이 가득하다.

 

그러면서도 어떤 쓸쓸함도 느껴진다. 저렇게 힘든 예술세계를 표현해내기까지 작가가 겪었어야할 영육(靈肉)간의 고통이 관람객의 마음마저 아리게 하는 것이다.

김화백은 61세에 뉴욕에서 뇌출혈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나 힘든 예술가의 삶이었을지 어렴풋이나마 짐작이 간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예술이 뭔지 모르는 우리네 일반인들도 이번 김환기 회고전에선 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한 작품만 봐도 정서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아득한 그리움의 끝 같은 것, 정체모를 불투명한 고독의 끝 같은 것이 한 예술가의 청정한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메마른 현대인의 영혼이 정화(淨化)되는 '예술적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