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해질 무렵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듣는 즐거움

스카이뷰2 2012. 6. 28. 13:11

 

 

1964년 작 동백아가씨.        

 

 

해질 무렵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듣는 즐거움

 

 

요즘 웬만한 주변사람들은 거의 다 “사는 데 별 낙(樂)이 없다”는 하소연을 한다. 살아가는게 너무 팍팍하다는 얘기다. 그런 분들에게 외람되지만 나의 소소한 삶의 낙을 말해주고 싶다. 뭐 대단한 정보라도 기대하신 분들은 어쩌면 ‘에이, 시시하구만’이라고 어깃장을 놓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 외람된 말씀을 한 마디하고 싶다. ‘고달픈 인생살이’ 속에서 ‘낙’은 거저 얻는 게 아니라고... 시시하고 너저분한 소재에서라도 자기만의 ‘작은 즐거움’을 만들어가면서 사는 게 우리네 일반서민들이 ‘인생을 즐기는 최상의 비법’이라고 어줍잖은 개똥철학을 얘기하고 싶다. 사설이 좀 길어졌다.

 

요즘 나는 해질 무렵이면 ‘20대 시절 이미자가 부른 동백아가씨를 듣는 즐거움’ 속에 힘들었던 하루를 포근하게 마무리하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좀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실 분도 많을 것 같다. 고고한 클래식이나 요즘 한창 잘나가는 백지영이나 아이돌 노래도 아니고 뜬금없이 웬 이미자야?라고 생뚱맞다는 표정을 지을 분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도 ‘동백아가씨’를 들으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돌이켜보는 ‘철학적 시간’을 가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느 날, 이미자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이 내게 “20대 한창 시절 이미자 동백아가씨 한번 들어 볼래”하며 USB에 내장한 그 노래를 틀어주면서 나의 ‘새로운 낙’이 찾아온 것이다. 마침 얼마 전 구입한 좀 괜찮은 새 차의 오디오시스템 덕분에 ‘문제의 동백아가씨’는 너무도 선명하게 나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다. ‘젊은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거의 ‘정신적 테러’를 가하는 것처럼 강렬하고 호소력 짙게 나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명주실을 직선으로 쭉 뻗어 올라가게 하는 것 같이 고우면서도 아주 살짝 허스키한 ‘20대의 이미자 노래’는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눈물날 정도로 감사하고 감동적인 순간을 선사했다.  누가 어떤 가요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젊은 이미자가 부르는 동백아가씨’라고 답하고 싶을 정도로 ‘젊은 동백아가씨’는 내게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렇게 소소한 일로 ‘대단한 정서적 충만감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닐 듯 싶다.

 

1941년생으로 올해 우리나이로 72세인 이미자는 1964년에 부른 이 동백아가씨로 ‘대한민국 최고 가수’에 등극했다.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몰렸다가 풀리는 설움을 당하기도 한 파란만장한 사연이 있는 노래다. ‘동백아가씨’가 나온 지 벌써 49년이나 되었으니 어지간히 오래된 노래다. 그렇게 ‘흘러간 유행가’를 요즘 ‘재발견’하고 들을 수 있다는 건 드라이하게 말하자면 ‘문명의 이기(利器)’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딱히 기계가 좋아져서만도 아닌 듯하다. 내게 ‘들을 귀’가 생긴 것도 일조를 했다고나 할까. '나이의 힘' 덕분일게다.

 

‘동백아가씨’를 부르는 스물세 살 이미자의 목소리는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폐부’를 찌르는 듯 예리하면서도 아름답다. 아름답다는 표현도 좀 아니다. 뭐라고 해야할까? 순정(純正)한, 순도가 매우 높은 다이아몬드같다고나 할까. 매력있고 로맨틱하면서도 서러운 정조가 바탕에 깔려 있어서 듣는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옛날에 읽었던 레마르크의 장편소설 ‘개선문’에 등장하는 관능미 넘치는 여배우 조앙 마두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부르면 어울릴 것 같은 섹시함도 ‘젊은 동백아가씨’에선 느껴진다. 더 이상 잘 부를 수 없을 정도로 20대의 이미자가 부르는 동백아가씨는 완벽한 목소리와 서정적인 멜로디가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다. 내 귀에 착착 감긴다고나 할까.

 

요즘 인기 절정이라는 백지영이나 태연이나 박정현 이런 젊은 여가수들도 노래는 꽤 하는 편이지만 20대 때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수준에는 발끝에도 못 미친다. 순박한 표정의 20대의 이미자가 부르는 ‘동백아가씨’를 해질 무렵 들을 수 있다는 건 거의 ‘천상의 축복’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땡큐 동백아가씨!

 

 

*아래 글은 제가 1994년에 쓴 겁니다.

 

 

<데뷔 35년의 가요계 여왕 이미자>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이라는 격찬을 받아온 이미자씨의 노래인생은 올해로 35년을 맞는다. 59년 ‘열아홉 순정’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2,000여 곡의 가요를 불렀고, 변함없이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듣고 있는 그의 가수로서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대구 효성여대 작곡과 박종문 교수는 계간지 ‘낭만 음악’ 1993년 겨울호에 <대중가수 이미자를 생각한다>는 장문의 논문을 발표, 음악계에 화제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다. 순수예술 음악을 전공했고, 대학에서 작곡이론을 강의하고 있는 대학교수가 ‘이미자 예찬론’을 과감하게 발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학계는 물론 대중가요계에서도 박 교수의 글이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이 글에서 “이미자가 무대 위에 등장했을 때나 텔레비전에 나타났을 때 무대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자애로운 왕비와도 같은 그윽한 분위기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라고 운을 뗀 뒤 구구절절 가수 이미자에 대한 헌시 같은 글을 이어간다. 박 교수는 한때 이미자씨를 그저 처량한 노래를 부르는 촌스런 구세대 취향의 다소 못생긴 여가수라고 생각하다가 이제는 “명창 이미자 여사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이미자씨의 이미지를 “슬픈 듯 따스한 눈빛과 다소곳이 움직이는 입모습과의 조화가 삶의 애환에 대한 연민과 이해에서 비롯된 것 같은 애잔함”으로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이미자의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누님이나 언니, 여동생, 딸, 어머니와도 같은 그녀의 품을 느끼며 서러움을 달래고 그리움을 삭이며 위로받고 위로하는 심정으로 노래를 듣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자의 노래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한풀이며 마음의 정화이면 깊은 교감”이라는 것이다.

 

한 젊은 대학교수가 이렇듯 이미자씨 예찬론을 발표한 것은 그야말로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신세대들이야 ‘가수 이미자’ 하면 ‘에이’ 하며 외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삼십대 이상의 사람들이라면 거의 이미자 노래와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의 가수 생활은 길었고, 노래 생명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길었다.

 

나 역시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대중가수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었을 때 맨 먼저 알게된 가수가 바로 이미자였다. 그때 어른들로부터 막연히 들었던 얘기로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못생겼지만 노래는 기가 막히다’는 소리였다.

60년대 초반 내가 살던 서울이 변두리 극장에 이미자씨가 당시만해도 크게 인기를 누려썬 가수 고복수씨를 따라 공연을 왔는데 나는 부모님을 따라 이 극장쇼를 구경갔던 일이 있다.

 

그때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나 어린 나는 그의 노래가 좋은지는 전혀 몰랐고, 단지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멋지게 부른다는 사실 하나가 부러웠을 뿐이다. 그 당시 나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의 노래가 좋다고 느낀 것은 ‘동백 아가씨’와 ‘친정어머니’라는 노래를 우연히 듣고 나서였는데 그때가 서른살이 훨씬 지난 다음의 일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뭐라 설명하기 힘든 그의 애잔하면서도 로맨틱한 음성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 같다. 어느새 이미자를 좋아하는 기성세대 중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어느 분야나 정상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면이 꼭 있는 법이다. 이미자씨 역시 정상을 차지한 사람답게 독특한 면이 많지만 그를 이토록 대성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는 물론 신기(神技)에 가까운 탁월한 목소리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개인 생각으로는 그의 변함없는 겸손함이 한 몫을 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언제 봐도 그는 변함없이 수줍어하는 듯한, 관객을 어려워하는 듯한 자세로 노래를 하는 것 같다.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사람들은 그런 이미자를 좋아하고,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닐까.

 

1964년에 그가 부른 ‘동백아가씨는 당시 10만장의 레코드 판이 팔려나가면서 그에게 부와 인기를 가져다준 은혜로운 노래이다. 지금이야 오디오시스템이 집집마다 보급된 상태여서 신세대들의 노래같지 않은 노래들도 툭하면 1,2백만장이 팔려 나가는 현상이 하나도 신기할 것이 없지만 60년대 세계 최빈국 중에 속했던 우리나라 경제사정을 감안해 볼 때, 참으로 대단한 판매량이 아닐 수 없다. 그 무렵 우리나라 국민소득은 10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극빈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 후 이 노래가 왜색조 시비에 휘말려 금지곡이 되면서 이미자씨의 가슴은 그 노랫말처럼 ‘빨갛게 멍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 무렵 개인적으로도 시련을 많이 겪었다. 한때 그는 노래를 그만 두려했지만 ‘동백아가씨’에 맺힌 한(恨) 때문에 도저히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89년 가요생활 30년을 기념하는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공연에서 해금된 이 노래를 눈물로써 불러, 한을 풀게 되었다.

 

한국 가요계를 뒤흔들어 놓은 ‘국민가수 이미자’는 그러나 자신의 35년 가수 인생을 “50점밖에 안 된다”고 말한다. 멋모르고 노래에 뛰어들어 정상을 차지했지만 지내놓고 보니 아쉬운 점이 더 많은 것 같아서다. 그러나 그는 작곡가 박춘석씨가 가수 데뷔 30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선물한 ‘나의 노래’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여자로서 가정적 시련을 한바탕 겪고 20여년 동안 다시 일궈낸 가정의 소중함을 너무도 사랑하는 그는 세월과 함께 더 자애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그의 노래가 있는 한 사람들은 그나마 덜 고달픈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