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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67>'맹목적 사랑받기'만을 원한 어리광쟁이 아인슈타인의 운명

스카이뷰2 2013. 1. 25. 00:09

 

                         

       맹목적 사랑받기를 원한 아인슈타인 박사.                                                  

 

 

아인슈타인이 원하는 사랑은 맹목적 사랑받기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딸 일제 대신 자기가 아인슈타인과 결혼한 것이 딸이 져야할‘운명의 십자가’를 대신 져 준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아인슈타인이라는 남자의 ‘공식 아내 역할’은 무척이나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었다. 하기야 이 세상 거의 모든 '아내의 길’이란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물론 외부적으로야 ‘최고 유명인사의 아내’자리가 주는 프리미엄으로 누릴 수 있는 몫은 적잖이 화려한 것이었다. 그 누리는 재미란 겉멋 들린 인생들에겐 꽤나 소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엘자가 기를 쓰고 인내해주는 만큼 아인슈타인은 편한 인생을 살았다. 일단 독신 시절이나 다름없는 ‘자유’를 실컷 누리며 산다는 게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살 때처럼 ‘마누라 등살’에 괴롭힘 당하는 일만큼은 없었다. 그들은 서로 고향 사투리를 써가면서 의외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대화하는 부부였다. 그럴 것을 왜 그런 ‘남부끄러운 결혼 소동’을 부려가면서 주변인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무엇보다 엘자는 사랑하는 사촌동생이자 남편이 된 아인슈타인에게 어린 시절 함께 즐겨 먹던 슈바벤 요리를 주로 해주었다. ‘요리 잘하는 아내가 최고’라는 속설도 있듯이 어린 시절 입맛에 길들여진 추억어린 요리를 맘껏 먹으며 아인슈타인은 팔불출처럼 아내 자랑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아인슈타인은 엘자가 “조숙한 아이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부모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이게 바로 아인슈타인이 바라는 ‘구원의 여인상’이다. 맹목적인 사랑을 자신에게 아낌없이 주는 존재-이런 여인상이야말로 아인슈타인에게 꼭 맞는 여성이다.

 

물론 그 여성은 대가 센 아인슈타인의 비위를 맞춰주려면 등골이 휜다는 것쯤은 각오하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아인슈타인이라는 남자가 아내라는 여자에게 요구하는 여성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엘자가 ‘불행한 결혼생활’만을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나름대로 ‘결혼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아인슈타인을 그녀의 영역 안에서 쥐락펴락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지혜롭고 현명한 여성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친구들은 그녀가 아인슈타인을 아들처럼 취급한다고 생각했다. 오죽하면 ‘뉴욕타임스’에도 ‘엄마 같은 애정을 쏟는 엘자’에 대한 기사가 실렸을까. 그런 엘자의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생각이야말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부부 스타일이 있는 법이다. 어떻게 살아가든 그것은 온전히 그들 몫이지 누가누구에게 지시를 내리거나 복종해야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냥 자기들 편한 대로 한 세상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엘자를 택한 것은 그의 운명이었다. 의무감으로 마지못해 했다던 첫 결혼의 실패가 그의 운명이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