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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69>일본에서 욘사마 배용준보다 더 인기를 모은 아인슈타인

스카이뷰2 2013. 1. 27. 00:21

 

 

                                    

                     일본 방문시 요정에서 게이샤들로부터 술잔을 받고 있는 아인슈타인 부부.(다음자료사진

 

 

일본에서 욘사마 배용준보다 더 인기를 모은 아인슈타인

 

  노이만은 아인슈타인보다 무려 20여년이나 어린 아가씨였지만 아인슈타인을 어린애처럼 다뤘다. 그녀의 그런 대담한 면이 늘 보호받기를 원하는 소년 취향의 아인슈타인에겐 마약 같은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지구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별 같은 존재였다.”이 말은 아인슈타인이 노이만을 향해 바친 최상의 사랑의 송가였다. 

 

아무리 관대한 엘자라도 자신이 공개적으로 모욕을 당하면 참지 않았다. 특히 베티 노이만에 대한 일이 세상에 드러나자 그녀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그녀는 다 큰 두 딸들에게 이젠 더 이상 아니라는 걸 말했지만 딸들은 모친이 아인슈타인을 떠나지 못할 것을 알고 확실한 선택은 어머니에게 달려있다는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딸들 역시 엘자가 늘 보여주곤 하는 우유부단한 태도에 이골이 났던 것이다. 새삼 왜 그러시냐하는 냉소적인 반응이었던 거다. 왜아니겠는가. 딸들은 무슨 죄가 있어 '엄마의 사랑싸움'에 하루가 멀다하고 시달려야하겠는가 말이다. 지금 우리네 현실에도 아마 이런 가정들이 꽤나 있을 것이다. 자식들 앞에서 만날 '이혼타령'이나 하는 부모들을 주변에서 적잖게 봐오고 있다. 그런 부모들의 무책임한 타령이 자식들의 마음을 얼마나 다치게 하는지를 그들은 모른다는 얘기다.

 

사실 엘자는 천성이 쾌활하고 명랑하면서도 순진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그런 기벽과 요란한 여성편력 탓에 알게 모르게 서서히 골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그 유명한 말처럼 엘자의 몸에는 불안으로 인한 '깊은 병'이 서서히 그녀의 마음과 몸에 침투해 들었다.

 

1922년 노벨상을 받기 전부터 아인슈타인은 이미 세계적 명사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어린애 같은 순박한 성품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꾸미지 않은 소박한 모습, 검소한 옷차림, 서민적인 취향과 천방지축 오만했던 학창시절과는 영 달라진 듯한 겸손한 태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노벨상 수상을 정점으로 그는 당대 최고 유명인사가 되었고 세상 여기저기서 그에게 ‘러브 콜’을 보내왔다. 물리학자로선 선례가 없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다녔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의 아인슈타인의 인기는 여느 연예인이 부럽지 않았다.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1922년 11월 아인슈타인 부부는 일본 잡지 ‘가이조(海潮)’의 후원을 받아 일본을 처음 방문했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강연을 들으려 했다. 탤런트 배용준이 일본 아줌마들 사이에‘욘사마’로 대접받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일본 유사 이래 그렇게 열광적 대접을 받은 외국인은 아인슈타인이 아마 첫 손님이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 시사만화가 이페이 오카모토는 아인슈타인의 파이프 문 프로필 캐리커처를 코믹하게 그려주면서 그의 걸음걸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조용히 걷는다. 마치 진리를 놀라게 할까봐. 진리가 놀라서 도망이라도 갈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계속>

    

부인 엘자와 함께 걷고 있는 아인슈타인(네이버사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