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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70>19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한 아인슈타인의 자필논문,일본 경매서 600만불 낙찰

스카이뷰2 2013. 1. 28. 00:03

 

 

1922년 12월 아인슈타인이 받은 노벨물리학상 메달 앞면(위)과 뒷면엔 아인슈타인 이름이 새겨져있다.

                 

 

192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한 아인슈타인의 자필

논문,일본 경매서 600만불 낙찰

 

 

 학생시절이나 청년 시절 성큼 성큼 걸어다녔던 아인슈타인이 아마 일본이라는 ‘조용한 동양의 나라’를 방문하면서 자신도 조용한 일본예절에 덩달아 조심스러워 한 것 같다. 원래 아인슈타인은 활달하고 거칠 것 없는 성품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조용히 걸었다는 것은 마치 초등1학년 개구쟁이들이 남의 집에 가면 일단 조용해지는 것과 마찬가지 원리일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라는 사람은 늙어서까지 자신감과 호방함으로 바람을 가르고 걸어 다니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말이다. 

 

1922년 당시 유럽의 정세는 불안한 시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그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통보를 노벨상 위원회로부터 받았지만 일본을 비롯한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등 아시아 순회여행을 강행하기로 했다. 일본으로 가는 증기선 안에서 아인슈타인은 노벨 물리학상 수상결정 소식을 들었다.

 

아인슈타인은 아시아 순방여행 중 특히 일본과 일본 사람에게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일본 잡지사의 후원 조건 중 하나는 ‘가이조’ 잡지에 여행 소감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가족 사이의 유대가 강한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높이 평가했다. 어쩌면 자신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자기 가정에 대한 무의식적이 죄책감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개인적 소박함이나 순수하고 차분한 일본 정신 등을 잘 보존해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마도 당시 대부분 유럽 지식인들이 깔끔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일본문화에 경도되었듯이 아인슈타인도 그런 시대적인 트렌드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가상인터뷰가 가능하다면 아인슈타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다. 당시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의 침략행태에 대해서 그는 과연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가 궁금하다. 아인슈타인은 군국주의나 민족주의를 아주 싫어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일제침략만행에 대해 생각했더라면 그렇게 일본문화를 대놓고 찬양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제국주의가 판치는 시대였다 해도 남의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야만적 행위에 대해선 아인슈타인도 반대했을 것 같은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인슈타인이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보낸 편지에 서명한 덕분에 즉각적으로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연구 작업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은 백기를 들었다. 그때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인슈타인의 통역을 맡았던 일본인 이나가키 모리카스는 아인슈타인의 여행을 후원했으며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까지 우정의 교류를 지속해 나갔다.

 

아인슈타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증서(아인슈타인 관리홈피)

 

 

 

 

아인슈타인이 1944년 자필로 쓴 특수상대성이론 논문은 일본의 경매에서 60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아인슈타인의 기념품들을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일본의 스키모토 겐지라는 대학교수일 정도로 일본인들의 ‘아인슈타인 숭배’는 열렬했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의 ‘외국인 유명인사 취향’은 여전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