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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71>시온주의를 알면서 유대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 아인슈타인

스카이뷰2 2013. 1. 29. 00:05

 

                                                                   

프린스턴시절의  아인슈타인-생애 최고의 행복감을느끼며 살던 시절.                                                                                   

                                                                                                                                                                                                       

                                                            

유대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낀 아인슈타인

 

 

노벨상 수상을 전후해 아인슈타인의 사회참여는 본의 아니게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공인으로서의 무게를 갖게 되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유대인이라는 점이 그의 정치 사회적 존재감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유대인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아인슈타인은 독일정부에겐 편치 않은 존재였다. 세계대전 패배로 인한 경제사회적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선 사회적 희생양이 필요했던 독일 정부는 아인슈타인을 제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1920년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반대하자는 이상한 캠페인이 열렸다.

 

반대할 게 없어서 하필이면 상대성 이론을 반대해야했는지. 독일인에게는 유대인 아인슈타인이 새로 내놓은 상대성 이론이 무너져야만 독일인의 우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전기가 될 것이라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 자리에 혈기 방장한 아인슈타인이 참석하자 인종 차별주의자들은 ‘아인슈타인 아웃’을 외쳐댔다. 반유대인 전단지가 뿌려지는 분위기에 아인슈타인이 참석한 것은 아인슈타인이란 사람의 무모한 용기를 만 천하에 과시한 셈이다. 타인의 시선을 별로 두려워하지않는 대범한 스타일이라고나 할까.

 

아인슈타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과감하게 반기를 드는 칼럼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때부터 독일인과 유대인의 대결국면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아인슈타인은 독일인의 ‘공공의 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민족주의 같은 것에 별 관심이 없었던 아인슈타인은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글을 발표했다.

 

자신을 늘 이방인이라고 여기고 있는 아인슈타인은 떠돌이 취급을 받고 있는 망명객들을 보면서 그들에게서 동지애를 느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부모나 친구들이 독일인으로의 정체성을 가지려고 노력했던 건 온당치 못하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아인슈타인은 시온주의가 유대인들의 공동체 의식을 고양시키고 존엄한 존재로 거듭나게 해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자치구역을 만들고자 탄생한 것이다. 이 시온주의를 만나면서 아인슈타인은 평생 처음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독일 민족주의만큼 유대민족주의도 찬성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런 아인슈타인이 자신들의 운동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우주의 움직임을 늘 주시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으로서는 편협한 민족주의로 서로 반목하고 서로 갈등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계속)

*사진자료=아인슈타인 관련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