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학생'이고자 했던 아인슈타인박사.(다음 자료화면)
'영원히 학생처럼 공부하면서 살자"던 아인슈타인
그해 4월 아인슈타인 부부와 훗날 이스라엘 초대대통령이 될 바이츠만 부부는 미국을 처음 방문했다. 수많은 군중의 환대를 받으며 아인슈타인은 그 특유의 유머 넘치는 달변을 토해냈다. “사람들은 마치 바눔(Barnum) 서커스가 온 것처럼 우리를 환영했다. 늙은 과학자보다는 기린이나 코끼리를 구경하는 편이 더 재미있을 텐데...” 뉴욕의 맨해튼 홀 안팎에는 무려 1만 명 가까운 군중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아인슈타인은 영화의 천재 채플린을 좋아했다. 그는 미국을 두 번 째 방문한 1930년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구경하던 중 채플린을 보고 싶다고 말해 즉석에서 채플린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두 천재는 ‘가로등’이라는 영화 시사회에 함께 참석했다.
그들을 보고 환호의 박수를 보낸 군중을 보면서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를 반기는 박수를 보내고 당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당신에게 뜨거운 환영의 박수를 보내는 겁니다.”
1922년 4월, 그는 파리의 소르본 대학의 프랑스 철학 협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위트 넘치는 언변으로 자신의 상대성 이론 성공을 이렇게 확신했다. “상대성 이론이 사실이라고 증명되면 독일은 내가 독일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프랑스는 내가 세계의 시민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만약 나의 이론이 허위로 판명된다면 프랑스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말할 것이고 독일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말할 것이다.”
1928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강연 도중 쓰러졌다. 극심한 과로로 인한 발병이었다. 베를린으로 돌아온 그는 절대적 안정을 취하며 무염식품만 섭취해야하며 금연해야한다는 의사의 지시를 받았다.
병상에서도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노벨상까지 탔으면 이제 쉬어도 되련만 그는 더욱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연구할 정도였다. 수십 년 전, 어느 해 봄 첫 부인 밀레바에게 “영원히 학생처럼 공부하면서 살자”는 편지를 보냈던 그 열정이 쉰 살이 된 ‘청년 아인슈타인’을 여전히 포로처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학문에 대한 죽음보다 강한 유혹은 그가 운명하기 몇 시간 전까지 지속되었다. 실로 숭고하고도 영원한 ‘학생정신’을 잃지 않은 아인슈타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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