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이 병에 걸리자 엘자는 더 바쁜 일상을 보내야했다. 간호하랴,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편지들을 정리하는 것은 쉰 살이 훨씬 넘은 그녀에게 벅찬 업무였다. 그녀는 고향 슈바벤 출신 32세의 처녀 헬렌 듀카스를 비서로 채용했다. 헬렌이라는 비서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수십년 간 아인슈타인의 ‘충직한 보호 견’처럼 그가 세상 뜰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고, 자신이 죽는 날까지 각종 편지들을 공개하지 못하도록 지켜냈다. 아인슈타인의 사후까지 그의 신변을 보호한 ‘영원한 비서’이자 ‘영혼의 경호원’이었던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도 ‘여복’이 많은 사나이였다.
1929년 아인슈타인의 50회 생일은 여느 유명학자들 보다 화려하고 성대했다. 독일 총리를 비롯해 스페인 국왕 미국의 후버 대통령 그리고 일본 천황등이 축하 전보를 보내왔다. 아인슈타인의 제자들과 한 은행은 돈을 모아 그에게 요트를 한 척 선물했다. 아인슈타인은 연구에 지쳤을 때 기분 전환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바이올린을 꼽았고, 그 다음이 요트 타기였다. 그는 강물 위에 요트를 띄워 놓고 그 위에 몸을 맡기고 아무 상념도 없이 출렁이는 물살을 느끼는 것에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그 요트를 툼머(Tummer,곡예사)로 명명하고 하벨 강에서 요트 타기를 즐겼다. 그의 의붓딸 마고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전 아인슈타인의 요트타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와 요트를 타고 있으면 마치 아버지가 요트의 한 부분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 자신이 하나의 자연이었으며 아주 자연스러우면서도 강한 어떤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아버지는 오디세이처럼 바다를 헤쳐 나가시곤 했다.”
만년 프린스턴 시절에 아인슈타인은 새로 장만한 요트를 티네프(Tinnef, 이디시 어로 싼 물건이라는 뜻)로 이름 짓고 요트를 타고 카네기 호수를 돌아다녔다. 물고기자리로 태어난 남자여서 유독 물에서 노는 걸 즐겼던 것 같다. 맏아들로서 평소 부친과 트러블이 많았던 한스였지만 요트의 첫 승선자가 되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아버지와의 응어리를 풀었다.
그는 아들의 편지를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기쁘게 여겼다. 금전 문제로 전처 밀레바와 다투고 나면 ‘엄마 편’인 아들의 소중한 편지가 끊어지는 걸 제일 가슴아파하곤 했다. 그는 한스가 결혼 문제로 자신의 속을 썩일 때에도 언제나 아들의 편지를 기다리곤 했다. 그는 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썽꾸러기 아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내 성격의 주요특성을 물려받은 아들이 있다는 게 기쁘구나. 비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단순한 존재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 이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인간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책이자 유일한 길이란다.”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가 물리학에 전 생애를 걸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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