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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75>나치에 의해 현상금 5천달러 걸린 아인슈타인의 저항

스카이뷰2 2014. 10. 23. 10:47

1922년 12월 아인슈타인이 받은 노벨 물리학상 메달.

 

 

나치에 의해 현상금 5천달러 걸린 아인슈타인의 저항

 

 

1930년9월, 불안한 국내외 정세를 틈타 독일 총선거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세력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등장에 대해 곧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산이었다. 유대인들을 배척하는 반유대사상이 점점 팽배해져갔고, 아인슈타인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인슈타인이 강연을 하는데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위협한 일도 발생했다. 심지어 반유대인 단체에서는 아인슈타인을 죽이는 사람에겐 상금을 주겠다는 공지까지 내걸 정도였다.

 

때마침 해외 유수의 대학들에서 아인슈타인에게 교수 자리를 제의해왔다. 1930년 12월 그는 미국 페사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기술연구소의 방문교수가 되었다. 1932년 봄에는 미국 교육사업자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의 제안을 받고 프린스턴에 건립될 고등연구소에서 1년 중 6개월 동안 연구하기로 합의했다.

 

그 직후 친구 안토니나 발렌틴이 급히 달려왔다. 독일군 최고사령관으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제보를 듣고 전하러 온 것이다. 1932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캘리포니아 기술연구소로 떠날 준비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 대학 동료들에게 4월에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 이후 아인슈타인은 영원히 독일 땅을 밟을 수 없었다.

 

1933년 봄부터 나치의 유대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부재중인 아인슈타인 자택도 압수 수색 당했다. 다행히 엘자의 딸 마고가 파리로 떠나기 직전 아인슈타인의 주요 논문들을 주 베를린 프랑스 대사관으로 몰래 보낸 덕분이다. 아인슈타인은 간발의 차이로 목숨을 구한 셈이 되었다.

 

1933년 3월말, 아인슈타인은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아쉬웠지만 프러시안 학회를 탈퇴했다. 나치 언론들은 그의 국적 포기를 대서특필했다. 소년시절에도 한 차례 독일 국적을 포기했던 아인슈타인에게 독일 국적 포기는 별로 아쉬울 게 없는 일이었지만 물리학 이론을 토론하며 끈끈한 인간관계를 쌓아왔던 프러시안 학회를 탈퇴하는 건 섭섭했다.

 

그 후 독일대학내의 모든 물리학과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독일 내의 아인슈타인의 재산이 몰수되고 그에게 5천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가 그렇게 비싼지 몰랐다는 농담을 하긴 했지만 결국 자신이 살 곳은 미국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인슈타인은 2차 대전 막바지에 독일에 살던 자신의 친척 여러 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희생된 비극을 겪었다. 그는 “독일의 만행은 문명국가들의 역사 중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는 비판과 함께 “나치를 방치한 독일 지식인들의 어정쩡한 태도도 나치 일당이 저지를 범죄보다 나을 게 없다”고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1916년 발표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일반상대성 이론’에 관한 책이 독일에서 출판되는 것을 금지했다. 그로서는 가장 강력한 저항의 표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