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세 '청년 작가' 최인호 ‘별들의 고향’으로 떠나다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의 별세소식을 듣는 순간 '30대 청년 최인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광화문의 한 신문사에서 신상옥 감독과 대담을 마친 최인호는 광화문 횡단보도 앞에서
'우우'소리를 지르며 뜀박질해 보도를 가로질렀다.
그와 함께 서있던 그보다 어렸던 우리들은 그저 웃으면서 작가의 행보를 지켜봤다.
한창 '재기(才氣)'가 승했던 시절이다. 그만큼 패기만만했고 인생과 문학에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대한민국 문단에서 '평단'과 담을 쌓고 오로지 '자수성가'로 입신양명한 작가가 바로 최인호다.
당시 최인호의 '문장'은 그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빤짝였다. 그때까지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멋진 문체였다. 1945년생 해방둥이 작가로 일찍이 고교 2년생때 신춘문예와 인연을 맺은 최인호는 지금
한창 지가를 올리고 있는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더 화려한 '문학인생'을 살아왔다.
온 국민이 가난했던 1970년대 '글만 써서 밥벌이'가 가능했던 유일한 작가였던 고인은 '세상에 무서울 게 없는'청년작가로서 암울한 시기의 대한민국 국민에게 활력소 같은 존재였다. 특히 '청년문화'의 기수로 그가 손대는 작품은 소설이든 영화든 노래든 뭐든 히트하는 '마이더스의 손'같은 재간있는 솜씨를 보여줬다.
상복은 별로 없는 최인호에게 1972년 현대문학상 신인상을 안겨준 ‘타인의 방’은 현대 도시인의 불안과 소외, 고독을 제대로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인의 고독'을 '당의정'처럼 그려내면서 그 안에 서려있는 슬픔을 뛰어나게 묘사하는 재주를 보여줬다.
1973년 작가는 조선일보에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조남현 전 서울대 교수)라는 찬사를 받았다. 당시 술집 호스티스들의 '인기 예명'이 바로 '경아'였을 정도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은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 가난했던 대한민국에 소설 100만부 시대를 연 주인공이 바로 최인호였다.
작가가 1975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한 연작소설 ‘가족’은 2010년 연재를 마치기까지 무려 35년 동안 작가의 가족, 주변 이웃의 이야기를 기록하며 대중 독자들과 소통했다. 그의 연재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국내 잡지 최장 연재기록으로 남아 있다. 엄청난 인내를 바탕으로 세워졌을 이 기록에서 혈액형이 'A형'인 작가의 삶에 대한 치열한 자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문단의 손꼽히는 악필이었던 작가는 펜을 고수하는 이유에 대해 “한 자 한 자 소설 쓰는 정성은 펜이어야 가능하다. 또 ‘나를 떠나가는 문장’에 대한 느낌은 자판과 펜이 현격히 다르다”고 했다. 그의 연재소설이 실리는 신문사에는 '최인호 전담' 문선공이 있을 정도였다. 컴퓨터로 움직이는 21세기 신문사와 독자들에겐 상상하기 어려운 얘기지만 그 시절엔 그게 하나의 '낭만적 풍경'이기도 했다.
작가는 살아 생전 100권이 넘는 중, 장편소설과 에세이집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불새’(1980년) ‘지구인’(1980년) ‘안녕하세요, 하느님’(1981년) ‘깊고 푸른 밤’ ‘위대한 유산’ ‘적도의 꽃’(이상 1982년) ‘고래사냥’ ‘가면무도회’ ‘전람회의 그림’(이상 1983년)을 펴냈다. 1983∼84년에는 ‘겨울나그네’를 신문에 연재했다.
1997년 신문에 연재한 ‘상도’는 판매부수가 300만 부가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조선시대의 거상 임상옥의 인생유전을 다룬 ‘상도’는 바른 상행위와 경영의 도가 무엇인지 보여주면서 경영자들의 '필독의 서'가 되기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민간인 시절' 이 '상도'에 나오는 '계영배'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열정적 글쓰기로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하던 작가는 2008년 침샘암 발병 이후 공식 활동을 접었다. 이 병은 침샘에 문제가 생겨 침이 나오지 않고, 목에 난 혹이 기도와 식도를 막는 증세여서 작가의 몸무게는
47㎏까지 떨어졌다.
암 투병 와중에도 작가는 '초인적 의지'로 200자 원고지 1200장짜리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완성했다. 단 두 달 만에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그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진짜 문학은 남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쓸 때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하루하루가 축제였다"고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애써 말하기도 했다.
그는 '백척간두'에서도 '작가의 길'을 지켜낸 자신을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내년 만우절 기자회견을 열고 ‘암에 걸렸다고 한 것은 외로워서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며 유쾌한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다. 최인호다운 재담이다.
일부 인기 작가들이 '정치권'을 기웃거린데 비해 최인호는 초지일관 '독립적 작가'로서의 품격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늘 진 인생들의 아픔'을 섬세한 문장으로 그려냄으로써 그들에게 '위로의 힘'이 되기도 했던 작가는 투병기간 중에도 '소외받는 인생'들에 대한 애정을 져버리지 않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작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의 '말씀의 이삭' 코너에 이런 절절한 신앙고백을 하기도 했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이미 2010년에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선고까지 들었지만, 작가는 그 시한부 선고를 3년이나 더 살아내며 '끝까지 작가'로 죽겠다는 마지막 다짐을 꿋꿋하게 보여주고 초가을 저녁 '별들의 고향'으로 홀연히 떠났다.
*이 자리를 빌어 삼가 고 최인호 작가의 명복을 빕니다*
작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자신의 사진 중 하나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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