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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어머니’ 프라하의 매력,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의 존재감

스카이뷰2 2014. 9. 17. 09:41

           

  연금술사들이 살던 황금거리. 이근처에 카프카의 생가가 있다.  블타바 강변 다음자료사진                    카프카            밀란쿤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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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어머니’ 프라하의 '카페 맨'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

 

‘당신은 프라하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무래도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라고 답할 것 같다. 일찍이 프라하라는 도시에 대한 명성은 많이 들어왔지만 정작 그 도시에 발을 들여놓고 프라하의 공기를 마시면서 왜 예술가들이 프라하에 목을 맸는지 알 것 같았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예술가처럼 ‘변신’시켜주는 마력을 갖고 있는 도시가 바로 프라하다. 그윽하다고나 할까.

 

어떤 거부할 수 없는 투명한 매력을 휘감고 있는 듯한 도심의 건축물들은 고딕 양식에서부터 바로크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양식 등 그야말로 ‘유럽 건축 박물관의 거리’라는 영예로운 명칭을 당당히 자랑하며 도열하고 있었다. 파리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더 아늑하고 따스한 느낌이 드는 그런 분위기가 아마도 그 숱한 예술가들에게 ‘영감(靈感)의 원천’으로 존재하게 된 것 같다.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꼽히는 프라하는 ‘변신(變身)’의 작가 카프카의 태생지이자 삶을 마무리 한 곳이다. 1883년 7월 3일 프라하 중심가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독일계유대인이자 체코 국민이라는 다소 복잡한 ‘정체성’으로 인해 혼돈의 감정을 가질 법하지만 그는 “자기 자신 이외의 어디에도 조국을 지니지 않은‘ 영원한 이방인이면서도 고향인 프라하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게자리 태생답게 예민하고 소심하면서도 재주 있는 카프카는 프라하의 엘리트 양성 고등학교를 거쳐 프라하대학에서 법률학 박사학위까지 마친 ‘학구파’이지만 일찍이 19세 때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아버지 몰래’ 문학을 독학했다. “프라하는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프라하 사랑’이 대단했던 이 작가는 우리에게는 ‘심판, 성, 변신’등의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카프카에게 프라하는 전세계였고 전세계는 프라하였다.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감 부재의식 등이 카프카를 괴롭혔지만 그는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 카프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는 “나는 이제 이 일기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일기에 나는 매달려야 한다. 그 까닭은 그 밖에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했다.

 

카프카는 스스로를 ‘도시의 인디안’ ‘열락적(悅樂的) 산책가’라고 말할 정도로 저녁이 되면 프라하 시내의 공원과 골목길을 배회하는 것을 일과처럼 여겼다. 그의 주요 산책로는 옛 궁정과 시청사가 있는 코지 광장 주변이었다. 그곳은 바로 카프카의 세계였다.

 

그는 “내 인생은 이 작은 원 속에 갇혀 있소”라고도 말했다. 자신이 태어난 프라하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평생 프라하를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고 말했나보다.

카프카의 산책 끝의 기항지는 바로 카페였다. 그는 카페 사보이에서 연극구경을 즐기고 아르누보 양식의 에브로파 호텔 2층에서 자신의 작품을 손님들에게 낭독하기도 했다. 당시 프라하에서 가장 큰 카페였던 콘티넨탈도 그가 자주 찾던 카페였다. 그곳은 주로 독일계 인사들이 애용한 곳이다.  

 

20세기 초반 유럽 유명한 문인들이 카페를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고 거의 상주하다시피 했던 라이프스타일을 카프카도 즐겼다. 그는 카페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글쓰기에 매달렸다. 선병질적으로 보이는 카프카는 1924년 6월 3일 41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프라하에 도착하자마자 ‘카프카의 집’과 박물관 등을 둘러보았다. 카를 대교 못미처에 있는 광장 한 복판에 서서 강을 바라보며 오른편으로 2백 미터 쯤 떨어져 있는 곳에 카프카의 박물관이 있었다. 카프카 책방은 주인 사정으로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건물 외양에서 오히려 역사적 장소가 주는 중후함을 느꼈다. 

 

카프카의 흔적을 돌아본 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에 등장하는 구시가지 광장으로 갔다. 사회주의 체제시절 반체제 작가로 낙인 찍힌 밀란 쿤데라는 프라하를 떠나 파리에서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다방면에 걸쳐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다.  

 

쿤데라는 프라하를 “세상에서 가장 에로틱한 도시”라고 말했다. 시니컬한 표정의 밀란 쿤데라에게 어울리는 문장 같다. 어쩌면 작가의 눈엔 '연애대장'인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활보하는 프라하 거리를 상상하면서 에로틱한 이미지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역시 카페맨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는 프라하 영화예술대학(FAMU) 출신으로 모교에서 후학양성에도 오랫동안 힘써왔다.

밀란 쿤데라에게 배운 영화학도 중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감독들도 몇 명 있다. ‘아마데우스’‘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등으로 유명한 밀로시 포르만 ‘아빠는 출장 중’의 유고태생 감독 쿠스트리차도 쿤데라의 제자다. 모두 재간있는 제자들로 20세기 유럽영화사에 주역을 맡은 인물들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그 유명한 1968년도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 프라하의 지식인들이 겪었던 존재의 위기감에 쫓기며 ‘사랑’하는 상황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자유를 억압당하고 있는 작품 속 지식인들은 전문직에서도 쫓겨나 막노동을 하며 출구없는 상황에 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진다. 이런 상황은 쿤데라의 실제상황과도 유사했다.

 

한때 쿤데라의 모든 작품은 당국에 의해 학교 및 공공 도서관에서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이 비극적으로 끝난 뒤 소련의 억압을 받는 동안 그는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이 당하는 수난을 지켜봐야 했다. 

서울에선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는데 프라하의 한 낮 날씨는 무척 더웠다. 그래도 카프카의 집을 바라보며 백년 전 한 탁월한 작가가 숨 쉬며 살고 있던 공간을 바라본다는 자체가 정서적으로 만족감을 주었다.

아직 관광 성수기는 아닌데도 카를 대교와 바츨라프 광장을 비롯한 프라하 도심 곳곳은 관광객으로 넘쳐났다. 가이드의 설명으론 1994년 이래 해마다 1억 명! 가까운 관광객이 프라하를 ‘순례’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 시절엔 꿈도 못 꾸던 상황이다. 체코는 국민소득이 대한민국과 거의 맞먹는 2만 달러 내외라는 말에 또 한번 놀랐다. 소득은 비솟하지만 ‘문화적 유산’은 그들이 더 많이 갖고 있는 듯해 보였다. 프라하 외곽도시에서 나를 놀라게 했던 ‘기품 있는 공원’은 프라하에서도 역시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었다.

 

어쩌면 체코사람들은 도심의 공원을 자신들의 정원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공원은 아주 멋있게 조경되어 있었다. 도심 복판에 이런 공원들을 갖고 있다는 것에 그들은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우리나라 부동산업자들이라면 아마도 "저 금싸라기 땅을 저렇게 놀리다니 쯧쯧"하며 안타까워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프라하 도심의 광장이나 카를 대교 근처는 상업적 냄새가 물씬 풍겼다. 노점 아이스크림은 맛은 꽤 괜찮았지만 관광지여선지 서울 압구정동 카페 못지 않게 비쌌다. 그래도 고풍스러운 건축양식이 빼곡히 들어찬 도심의 형태는 여전히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하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트램이라는 전차 비슷한 교통수단도 프라하 거리를 ‘느림의 미학’이 존재하는 곳으로 느끼게 해주는 소도구 역할을 하는 듯 보였다. 어쩌면 프라하라는 도시는 아주 탁월한 무대 미술감독이 세심하게 만들어 세워놓은 연극무대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카를 대교를 가득 메운 관광객은 백인들도 많이 보였지만 한국인 일본인과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도 상당히 많았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크리스마스때 서울 명동거리를 뒷사람에게 밀리면서 걸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난간마다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다리 위에는 아마추어 화가들이 관광객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프라하 도심 풍경을 그린 풍경화 액자를 팔고 있었다. 앳된 소년풍의 청년이 풍경화를 팔고 있기에 "이 그림은 당신이 그린 거냐"고 물었더니 "마이 파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왠일인지 청년의 곱상한 얼굴엔 수(愁)가 어려있어서 괜히 내 마음마저 찡해왔다.

 

그런 노점 화가들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체코 정부에서 발급하는 ‘자격증’을 소지한 1급 예술인들이라는 설명을 듣고 잠시 울컥하는 느낌이었다. 어디를 가나 예술로 밥 벌어 먹는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가보다. 생태적으로 편한 삶을 거부하는 기질이 있는듯한 예술가들에겐 자존심 상하는 제도같기도 하다.

 

프라하는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배경도시로 자리잡은 것 같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전도연이 대통령딸로 나오는 ‘프라하의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줄거리는 다 잊어버렸지만 프라하에서 ‘연인들의 벽’이나 여주인공이 살던 집 그리고 카페 식당 이런 곳은 ‘프라하 연인 촬영지’라는 안내판이 붙어있을 정도다. 그만큼 한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얘기일 것이다.

 

천재 모차르트와 그를 시샘하는 라이벌의 삶을 조명한 ‘아마데우스’나 ‘미션 임파서블’ ‘트리플 엑스’ 같은 영화도 프라하 중심지를 배경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특히 유럽에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로는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힌다는 ‘시민의 집’ 1층 프랑스 식당은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다.

 

이 건물은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이 선포된 곳이며 2층의 스메타나 홀은 해마다 ‘프라하의 봄’이라는 국제 음악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건물 자체에 위엄이 서려있는 분위기다. 체코 대통령과 슬로바키아 대통령이 사이좋게 선언문을 낭독했다고 한다. 오후에 들러본 체코 대통령 궁 역시 헝가리 대통령궁처럼 경비병이 딱 두명 서 있어 경호가 허술해보이는 분위기였다.

 

마네킹처럼 부동자세로 서있는 '꽃미남 계열'의 경비병에게 웬 서양 아주머니가 다가가 부채로 얼굴을 향해 바람을 날려보내건만 잘생긴 경비병은 미동도 않은채 부동자세로 앞만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어떤 중년여성은 경비병 옆에서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보이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평화롭다고나 해야할지... 

 

낮에는 무척이나 덥던 프라하도 저녁 무렵에는 서늘해졌다. 한때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고,14~15세기 전성시대에는 파리 런던 빈 베를린 보다 더 큰 도시였다는 프라하는 거리의 아기자기한 건축물에서부터 자부심이 가득해 보인다. 게다가 시내 한 복판에선 모차르트나 스메타나 베토벤 등 클래식 음악가들의 ‘공연’이 셀 수 없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그래선지 프라하시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엔 당당한 자존감이 어려있는 듯 했다. 

 

우리가 저녁 어스름에 프라하 도심을 배회할 때도 ‘공연 전단지’를 꽤 많이 받았다. 공연 레퍼토리를 보니 말 그대로 ‘주옥같은 작품’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열리고 있었다. 한결같이 보고 싶은 것들이었다.

‘프라하의 야경’은 꼭 봐야 한다기에 한낮에 들렀던 카를 대교 근처를 다시 갔다. 프라하 역시 ‘백야(白夜)’여서 밤 아홉시가 다 되어 가는데도 이렇다 할 야경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그래도 관광객들은 한낮 못지 않게 계속 밀려들었다. 모두들 ‘프라하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밤 열시쯤에서야 강 건너편 ‘성채(城砦)’들에서 보석 같은 불빛이 반짝이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프라하의 '아름다운 밤'은 깊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