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영화 <타인의 삶>-2007아카데미 최우수외국어영화상수상작
*시끄러운 세상, 추억의 영화 한편 소개합니다.*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The Lives of others).’
제목에서부터 왠지 문학적이고 무언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을 듯한 무거운 분위기가 감지됩니다. 게다가 독일영화! 영화는 러닝타임이 140분이나 되고, ‘자유’가 없던 동독시절의 도청사건을 다뤘다는 점에서 볼까말까 망설였습니다.
고전적이면서도 윤택하고 풍성한 느낌의 영국영화에 비해 독일영화는 그들의 언어처럼 조금은 딱딱하고 굳어있는 듯하면서도 인생의 ‘기본법칙’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는 아주 독특한 연출력을 보여주곤 합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제목답게 ‘타인의 삶’은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는 동독의 유능한 비밀경찰 비즐러가 도청을 맡게 된 동독 최고의 극작가 드라이만과 그의 애인인 크리스타의 삶을 축으로 ‘자유’가 없는 사회에서 게다가 ‘도청’까지 당해가며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 예술가들은 기본적 자유마저 억압당한 채 은유적인 저항을 무대에 올리면서 간신히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려 하지만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들은 그들의 그런 작은 저항의 몸짓마저 용서하려 들지 않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참아내기 어려운 ‘자유 없는 세상’은 사회의 ‘공기 청정기’라고도 할 수 있는 예술가들에겐 말할 수 없이 참아내기 어려운 시련일 겁니다. 동독 정권은 도청을 통한 철저한 감시 속에 조금이라도 정부에 반항하는 예술가들을 그들의 설 자리인 ‘무대’, 곧 일터에서 무자비하게 제외시켜버립니다.
정부 당국자에게 협력하는 것은 영혼을 팔아버리는 것 같아 예술가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저항했다가는 생존 자체가 위협 당하게 되는 극한 상황이어서 그들은 비밀스럽게 서로의 고통을 얘기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갑니다.
도청!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단어입니다. DJ정부시절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던 임동원 신건, 이런 떵떵거렸던 고위관료출신들이 ‘도청지시’라는 죄목으로 푸른 수의를 입고 영어의 몸이 되는 걸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당시 함께 구속된 국정원 2차장은 결혼한 지 한 달도 안 된 딸이 자살한 비극도 겪었었지요.
그 때 중앙일보 회장하다가 주미대사로 발령받았던 홍석현 씨는 ‘도청의 피해자’였지만 그의 ‘언행’이 공개돼 결국은 그 좋다는 주미대사직을 내놓게 되었었지요. 홍씨는 주미대사를 시작할 무렵 “장차 유엔총장에 도전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혀 독자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 사람입니다.
지금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그런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저도 좀 민망해 했거든요. ‘내일 일을 말하면 귀신이 웃는다’는 일본 속담이 생각났었지요. 결국 유엔 총장 자리는 온화하고 겸손해 보이는 반기문 씨에게 돌아갔지요. 아무튼 도청의 불똥은 이곳저곳으로 튀어 그때 스타일 구긴 분들이 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도청실무자’중의 한 사람은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는 웃지 못할 고전적 협박멘트를 날려 국민을 웃기기도 했었지요.
‘도청’은 비단 DJ정부 시절에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YS때는 무슨 ‘미림사건’인가하는 제목부터 요상한 도청사건이 터졌었지요. 그 이전엔 예전 한나라당 시절 국회의원을 지낸 현 대통령 비서실장 김기춘씨가 부산 초원복집에서 “우리가 남이가, 장관이 얼매나 좋은 자리인데...”라는 말들을 한 것이 도청돼 세상을 뒤집어 놓았었죠.
그 밖에 박정희정부시절이나 기타 전· 노 정권에서야 말할 것도 없이 수많은 도청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세월과 함께 국민들의 뇌리 속에서 사라졌지만 지금이라도 인터넷 검색창에 ‘도청’을 쳐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수많은 사건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올 겁니다. 그만큼 흔하디흔한 ‘정치사건 용어’입니다. 도청, 투옥, 고문 이런 단어들은 한때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횡행했었지요.
미국에서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마저 물러났고, 세계 어느 나라나 이 ‘도청’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을 정도일 겁니다. 범세계적인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도청문제’는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체제유지를 위한 최선의 방책으로 악용되기도 했었지요.
‘타인의 삶’은 바로 이런 낯익은 정치 용어인 ‘도청’을 주제로 140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내내 관객에게 잠시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고 굉장한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즐거운 몰입의 시간이어서 전혀 괴롭지 않지요.^^
영화를 보시는 분들은 ‘동시대를 살아온 인간’으로서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삶에서 아련한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한 나라의 정신적 파수꾼인 예술인들이나 지식인들의 생존방식은 독재국가나 자유국가나 비슷할 겁니다.
이 영화에서는 감수성과 자존심이 침해당하는 걸 제일 괴로워하는 예술가들의 세세한 삶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한편 그들을 ‘도청’하는 냉혹한 비밀경찰의 의식변화도 아주 예리하게 보여주는 감독의 연출 솜씨가 대단합니다. 이 감독에겐 드라마를 엮어나가는 특출한 재능이 있어 보입니다.
1973년생인 플로리안 헨켈 본 도너스마르크(이름이 엄청 길지요^^) 감독은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금년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에 앞서 2006년 벤쿠버 영화제, 로카르노 영화제, 런던 영화상, LA 비평가협회상, 유럽 영화상, 골든 글로브 상에서 각본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촬영상 등등 아주 많은 상을 타는 ‘상복’도 누렸습니다.
독일 태생이지만 뉴욕 브뤼셀 런던 등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러시아 생트 페테르스브르크대학에서 러시아어를 런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 ,경제학을 전공한 ‘학구파’ 신인 감독이라고 합니다. 그런 젊고 패기만만한 감독의 데뷔작이 이렇게 세계적인 상을 골고루 받은 예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습니다. 신인감독의 작품이어선지 ‘신선미’가 화면 곳곳에서 감지됩니다. 80년대 동독의 풍경도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평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이 영화에서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과 그들의 역할에 맞는 뛰어난 외모입니다.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인 비밀경찰 비즐러 역의 울리쉬 뮤흐와 극작가 역을 맡은 세바스티안 코치, 그리고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자살한 연극연출가 알버트 역의 폴크마르 클라이네르트라는 배우의 생김새는 실존인물들보다 훨씬 더 생생해 보였습니다.
몇 년전 작고한 울리쉬 뮤흐는 ‘독일의 안성기’라고 하는군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비밀경찰로서 당대 최고의 극작가를 도청하면서 극작가의 삶에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차분하고 태연한 눈빛으로 연기하는 모습이 일품입니다. '도청 기술자'로서 그가 보여주는 집요함은 무서울 정도입니다.
그가 극작가의 집에서 브레히트의 시집을 훔쳐와 소파에 누워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장면과 극작가가 자신의 집에서 애인에게 들려주는 열정의 소나타를 도청관리실에서 ‘함께 들으면서’ 주르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으로 꼽을 만합니다. 역시 문학이나 음악같은 예술이 주는 정서적 영향력은 냉혹한 비밀경찰들에게도 그 저력을 발휘하나 봅니다.
세바스티안 코치는 뮤흐와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연기파배우라고 하는데요, 지성미로 잘 포장된 그 수려한 외모는 역시 ‘유럽 출신 배우’답게 당당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웬만한 유럽출신 배우들에게서는 남녀 모두 자존감으로 충만한 기품과 자신감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유럽의 오랜 문화예술적인 전통이 백그라운드로 작용하고 있어서일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기와도 같은 ‘자유’를 누리고 살 천부적 권리를 타고났다는 당연한 명제를 다시한번 떠오르게 한 영화입니다. 오랜만에 제게 문화적 충족감을 선사한 ‘타인의 삶’이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자세한 스토리는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모처럼 만난 흥미진진한 영화라고나 할까요? 암튼 요즘 말로 '강추'입니다! DVD로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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