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뉴욕 마라톤 대회
무라카미 하루키와 뉴욕 마라톤 맨발로 뛰기
올 뉴욕 마라톤 핫 트렌드는 '맨발로 뛰기'라는 기사제목을 보는 순간 두 어 가지 이미지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웃었다. 옛날이 생각나서다. 우선 ‘맨발로 뛰기’는 1960년대 대한민국 ‘청춘’들을 사로잡았던 서울법대출신 가수 최희준의 ‘맨발의 청춘’과 '매혹의 저음' 가수 남일해의 ‘맨발로 뛰어라’라는 '대박' 유행가를 생각나게 한다.
지금 젊은 세대들과, 40대 중반세대들까지는 최희준은 누구고 남일해는 누구냐며 생뚱맞은 표정을 지을 지도 모르겠다. 이러니 ‘2040 세대’와 ‘5060세대’가 단절되었다는 둥, 대한민국이라는 ‘저력있는 나라’가 금세 어찌 될 것 같은 호들갑이 매스컴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시대마다 유행가와 인기가수가 있다는 대 전제만 생각한다면 누가 누구인지 몰라도 별 상관없는 일이다. 그냥 그 시대엔 그런 사람이 있었고 이 시대엔 이런 사람이 있는 법이다. 예전 것은 우습고 지금 것만이 최고다라고 생각한다면 바로 우물안 개구리 신세가 될 것이다. 요새 시니어 층에선 자학이라도 하려는지 그저 '트위터세대 따라하기' 열풍마저 부는 것 같다.
1960년대 최고의 히트 곡 ‘맨발의 청춘’은 21세기 들어와 어느 아이돌 그룹과 남성 그룹에 의해 리메이크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청출어람이라지만 적어도 유행가 리메이크 만큼은 오리지날이 좀 윗길이지 싶다. 시대마다 정서적 배경과 트렌드가 달라서 일 것이다.
‘맨발로 뛰어라’ 역시 60년대를 흔들었던 빅 히트곡 중 하나지만 아직 리메이크 되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다. 단지 가요무대 같은 TV프로에서 이제는 노신사로 변한 남일해가 전성기 시절 자신의 이 히트송을 가끔 부르는 모습을 보긴 했다.
마라톤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디오피아 마라톤 선수 ‘아베베’다. 60년대 중후반 쯤, 당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서 세계적 스타가 되었던 선수다.
지금처럼 TV나 인터넷 등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이디오피아 마라톤 선수 아베베가 서울에서 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인솔’로 한강 인도교로 달려갔다.
이미 몰려든 인파로 ‘인산인해’였다. 한참 기다리고 있었더니 군중 속 누군가가 큰 소리로 “아베베가 온다, 아베베”라고 외쳤다. “어디 어디”하며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바람소리’처럼 윙윙거리며 내 귓가를 맴돈다.
초등생이었던 어린 나도 재빨리 어른들 틈새로 고개를 내밀고 ‘달려오는 아베베’를 볼 수 있었다. 키가 작고 새카만 아베베가 흰 이를 드러내며 힘차게 달려왔다. 맨발이었다.!!! 수십 년 전 일인데도 방금 인화지에 프린트한 듯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야말로 맨발의 청춘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서 그의 별명은 ‘맨발의 아베베’가 되었나보다.
군중들은 아베베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어린 나도 우리 가족과 함께 박수를 짝짝짝 쳤던 기억이 솔솔 난다.1960년대 서울에 살던 어느 한 家長은 특별한 볼거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사랑하는 가족을 '인솔'해 한강다리로 갔다. 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금메달을 땄던 맨발의 아베베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머나먼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서 달려온 아베베를 둘러싼 어느 가정의 ‘소소한 사실(史實)’은 시간이 한참 흐른 오늘, 한 장의 스냅사진처럼 괜찮은 가족풍경으로 내 마음 속에 자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요즘엔 이런 '가족의 낭만'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듯하다.
어쨌거나 전세계적으로 ‘달리기 열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해마다 11월 첫 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뉴욕 마라톤’의 올해 핫 트렌드가 ‘맨발로 뛰기’라니 왠지 반가운 마음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미 50여년 전 ‘맨발로 뛰어라’는 노래를 히트 시킬 정도로 이 ‘맨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는 점에서 한국청춘들은 프라이드를 느껴도 좋을 것이다.
‘청춘은 맨발이다’만큼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돼 있는 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맨발’이 아니면 청춘이 아닌 것이라고나 할까. ‘청춘의 대표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는 ‘맨발’은 순수함 열정 헌신 청빈 정의 등 온갖 좋은 단어들과 연결되면서 우리 청춘들의 이미지를 고귀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정작 ‘청춘’들은 그 좋은 이미지들이 자기들 것인 걸 모르기에 안타깝다. 연전에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책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것도 어쩌면 ‘눈 먼 청춘’들이 자신의 손 안에 들고 있는 보석들의 존재를 모르고 있기에 청춘들에게 바로 먹혀들었던 것이리라. (들리기론 요즘 청춘들은 몇 년 전 대히트했던 이 책에 대해 분노하고 있단다. 자신들을 놀리는 거라며...가뜩이나 백수로 힘들어 죽겠는데 그런 식의 입에 발린 소리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거다. )
또 하나 뉴욕마라톤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연상된 이미지는 아무래도 ‘마라톤 맨’ 무라카미 하루키다. ‘영원한 소년’을 꿈꾼다는 이 ‘철없는 초로(初老)’의 신사는 뉴욕 마라톤을 비롯 보스톤 마라톤 아테네 마라톤 등 전 세계 내로라하는 마라톤 대회에 참석, ‘마라톤 맨’하루키의 신선한 이미지를 전 세계 젊은 독자층에게 선사하기도 했다.
이제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려 30회!!!나 마라톤 완주를 해냈다니 그야말로 ‘대단한 하루키’다. 이 남자에게서 ‘달리기’는 거의 종교 비슷한 경지로 그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있는 듯하다. 하루키는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마라톤을 하면서 최고의 순간은? 이라는 질문을 받자 1991년 뉴욕. 3시간 25분 완주했던 때를 꼽았다.
1949년생이니까 하루키 나이 42세때 일이다. “ 센트럴 파크를 도는 마지막 코스는 무척 힘들거든요. 완주 기록을 뛰어 넘으려고 몇 번 시도했었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있어서 기록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있어, 제 자신 스스로 만족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더 중요해 졌습니다.”
마라톤을 직접 뛰어보진 않았지만 하루키의 이 말이 어떤 뜻인지 절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지금 내 ‘나이의 힘’ 덕분일 것이다. ‘나이 먹는 거’는 유년, 청소년 시절엔 신나는 일이었지만 이젠 나이로부터 ‘자유’로와 지고 싶기도 한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렇기에 하루키의 ‘기록 자체엔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는 말에 공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달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까지 말하는 하루키는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고도 말한다. 우리보다 하루 늦게 시간이 흐르는 미국 뉴욕에서 11월 6일 열리는 만추의 마라톤 대회에 하루키가 참가할 지 여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영원한 달리기 소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 마라톤은 그 남자의 육체를 단련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6일 열리는 뉴욕마라톤 참가를 준비 중인 '본 투 런(Born to Run)'의 저자 피터 맥두걸은 맨발로 훈련한다. 그는 멕시코 타라우마라스 인디언들의 방식을 따라, 발뒤꿈치가 아닌 발 앞부분이 먼저 땅에 닿도록 뛴다. 맥두걸 같은 '맨발 마라토너'는 올해 뉴욕마라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새 트렌드라고 한다.
맨발로 뛰기는 2009년 하버드대 진화인류학과 대니얼 리버먼 교수의 연구 논문에서부터 확산하기 시작했다. 리버먼 교수는 당시 기능성 러닝화를 신고 뛰는 사람과 맨발로 뛰는 케냐인들의 몸에 전달되는 충격을 비교했고, 맨발로 뛸 때의 충격이 훨씬 적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리버먼 교수는 "현대인들은 달리기용 운동화가 늘 존재했던 것처럼 생각하지만 지금 같은 전문 운동화가 개발된 지는 5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인간의 기나긴 진화 역사에서 볼 때 맨발로 달리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뜻"이라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맨발 달리기의 유행으로 이른바 '미니멀 운동화'의 인기도 올라가고 있는 중이다. '미니멀 운동화'는 발가락 양말처럼 생기고 바닥이 얇은 운동화로, 도심을 맨발로 달릴 경우 우려되는 발바닥 찰과상만을 예방하기 위한 기능만 갖춘 신발이라고 한다.
문득 하루키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영원한 소년”이고 싶다고 고백한 문장이 떠오른다.
‘미니멀 운동화’를 신은 채 만추의 센트럴 파크를 달리고 싶은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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