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국에 집중하고 있는 오자와 간사장과 조훈현 9단 ( 연합뉴스 사진)
조훈현 9단 인터뷰가 2페이지에 걸쳐 대대적으로 실린 오늘 아침신문 주말판을 보며 어렴풋한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5년전인가 조훈현 9단이 서울에 온 일본인 정치인과 대국을 둔 것을 보고 나는 조훈현 9단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대국 소감'을 물었고 그걸 우리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다. 프로바둑 기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조훈현 '국수(國手)'의 인생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고 대성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침신문에 실린 그의 인생이야기를 읽으면서 '생활인'으로서 그의 엄숙한 자세에 경의를 느꼈다.
조9단은 "생계를 위해 바둑을 둬야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고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달라서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마음을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건 먹고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저 먹고 사는 길부터 뚫어야 한다. 생계가 막히면 꿈이고 뭐고 없다. 치사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게 현실이다"고 말하는 조9단에게서 '인생을 관조하는 대가의 성실한 자세'가 느껴졌다.
가족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말하는 그에게서는 A형 이미지가 풍겼다. 당대 최고 국수의 혈액형이 궁금해져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역시 그는 혈액형 도망을 가지 못한 A형이었다.^^* '인고의 세월'을 보내온 대한민국 최고의 바둑 명인은 "자식으로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하는데 내겐 바둑밖에 길이 없었다"는 겸손한 고백을 했다.
<몇 해 전 제가 우리 블로그에 썼던 글을 다시보는 읽을 거리로 소개합니다.>
조훈현 9단과의 통화 -일본 민주당 오자와 간사장과 대국
오늘 아침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 덕분에 대한민국 바둑계의 ‘지존’ 조훈현 9단과 전화인터뷰를 했다. 조훈현 9단은 12월 12일 오후 2시 서울 조선호텔에서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라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과 대국했다.
이번 대국은 열렬한 바둑 팬인 오자와 간사장이 일본 기원을 통해 방한 기간 바둑을 둘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해 한국기원이 조훈현9단을 추천해 마련됐다. 4점 치수로 둔 이번 대국은 ‘접전’ 끝에 오자와 간사장이 245수만에 7집 차로 승리(!) 했다고 한다.
내 손바닥 크기의 ‘대국사진’은 아주 진지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둑 팬인 나로선 모처럼 ‘흐뭇한 상상력’과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정치와 바둑! 바둑과 인생! 이런 단어들이 뇌리를 스치자 공연히 마음이 바빠졌다. 우리 블로그 독자들에게 이런 재미난 소재를 글로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정상 바둑고수와 일본 정계 최고 실력자가 반상을 앞에 두고 진지한 ‘수담’을 나누고 있는 한 장의 사진에서 그야말로 ‘영감’을 얻은 나는 그 자리에서 생면부지의 조훈현 9단과 ‘전화 인터뷰’를 시도했다.
오전 11시 무렵 조9단은 집근처를 산보 중이었다. 정오 무렵 귀가한 그와 바둑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조훈현9단은 56세 중년남성답지 않게 아주 맑고 정갈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순수한 20대 청년 같았다. 조9단의 바둑 스타일이 고려청자처럼 고고하면서 단아한 ‘귀족적 분위기’로 평가받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 역시 자신의 바둑스타일과 어딘지 비슷한 것 같다. ‘목소리는 마음’이라는 일본 속담이 떠올랐다.
50년 가까이 바둑 외길인생을 걸으며 ‘한국 바둑 최고 정상’에 도달했던 쟁쟁한 ‘바둑 황제’는 “지금도 바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는 겸허한 소회를 말하기도 했다. 요즘 자신은 ‘승부’에서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중이라면서 ‘후배’들의 활약을 대견해 하는 뉘앙스의 말도 했다.
“이번 대국은 조 국수께서 살짝 져 드린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라며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나도 ‘대국의 진실’에 대한 심증은 확실하게 가지만 구체적 정황은 우리 독자여러분들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겠다.^^*
조9단은 오자와 간사장의 인상에 대해 ‘장군감’ ‘보스 스타일’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바둑 스타일 역시 세력적이고 전투적이며 공격형이라고 소개했다. “바둑을 배운지 6년밖에 안됐다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잘 두시는 바둑 스타일이다”며 오자와 간사장에게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꼬마들은 금방 늘지만 60대 후반 정도 연세에 그렇게 둔다는 것은 바둑에 소질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맥도 좋고, 행마가 상당합니다.” (오자와는 1942년생이다.)
대국을 마치고 조훈현9단은 이날 대국한 바둑판의 뒷면에 직접 글씨를 써서 오자와 간사장에게 전달했다. 한국기원에서는 공인 아마 6단증을 수여했다. 그는 “한국 제1의 프로 기사인 조훈현9단에게 바둑을 배워 감격스러웠다”는 답사를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오자와 간사장은 청와대에서 이명박대통령과 만찬회동을 가졌다. 아마 낮에 둔 바둑 이야기도 화제에 올랐을 법하다.
아마추어 강6단이라는 오자와 간사장은 그날 대국장에서 기자들이 바둑과 정치의 닮은 점을 묻자 “바둑이나 정치나 넓게 보는 대세관이 중요하다. 오늘 바둑에서도 상수의 대마를 잡으러 가는 나쁜 버릇이 나와 바둑을 망칠 뻔했다. 고수인 상대를 인정했어야 했다. 정치 역시 상대를 인정하면서 넓게 봐야 한다는 면에서 바둑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요즘 그가 보여주고 있는 ‘대외교관(對外交觀)’을 반영하는 듯하다.
조9단이 받은 인상처럼 오자와 간사장은 일본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쇼군(將軍)’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에서 ‘암장군(暗將軍)’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막후 실력자라는 얘기다. 그런 그가 드라마에서처럼 바둑 두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흥미로워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오자와는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의 일왕(天皇·덴노) 면담을 무리하게 주선해 일본 궁내청의 반발을 샀다. 일본 3대 메이저 신문인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신문들도 일제히 “덴노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쓸 정도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오자와의 ‘정치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방한중에도 “사죄해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말하는 등 ‘친한파’적인 면모도 과시했다.
그러니까 ‘오자와 바둑스타일’처럼 ‘대세’를 읽고 그에 따르려는 것이 그의 정치 스타일인 것 같다. 어쩌면 그의 정치는 바둑에서 ‘지혜’를 공급받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자신 ‘바둑’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하고 있다.
요즘 애시청하고 있는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에서도 여주인공 아츠히메는 주요한 정치적 이야기를 할 때 상대와 반상을 마주한 채 의견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바둑과 정치는 1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미지 면에서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둑을 좋아한다. 바둑알 잡는 법도 잘모르는 주제건만 바둑에 관련된 이야기는 청탁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나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챔피언 이야기도 좋지만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던 패자들의 이야기에는 더 관심이 간다. 승자와 패자 모두 ‘품격 있게’ 이기고 졌다는 소식이라도 듣는 날이면 왠지 뿌듯한 마음마저 든다. 이런 바둑이야기는 우리네 인생에 넉넉한 여유를 선사해주는 것 같다.
바둑을 잘 둘 줄도 모르면서 좋아한다는 건 넌센스라고 할 분들도 있겠지만 공한번 차 본 일 없어도 축구를 좋아하고 알 한번 제대로 쥐어보지 않았지만 바둑 이야기는 무조건 좋아한다.
축구와 바둑은 무덤덤한 인생살이에 신선한 양념이라고나 할까? 언제 들어도, 언제 봐도 즐거운 것이 이 바둑과 축구다.
축구가 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뿜어대는 힘찬 야성미로 매료시킨다면 바둑은 19줄 날줄 씨줄 속에 숨어있다는 무수한 비기(秘技)와 광대무변한 우주와 같다는 반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바둑 명인들의 비장미 감도는 운명적 스토리가 나를 유혹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바둑대첩’ 이야기 중 ‘라이벌과의 운명적 대국을 하던 명인이 마지막 돌을 던진 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비극적 스토리는 처음 듣는 순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감동을 느꼈다. 요새도 가끔 그 얘기가 떠오르면 뭉클해지곤 한다.
그야말로 운명을 건 한판 승부에서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명인의 마지막 모습이 서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람으로 태어나 목숨 걸고 매달리는 일이 있고, 그 일에 결국 목숨을 바친다는 건 왠지 비장하면서도 매력적인 장면처럼 보이는 것 같다.
작은 바둑판에서 펼쳐지는 혜성처럼 나타난 새로운 자객과 기존의 막강 무림고수들의 한판 필살기! 서로 몰래 연마해온 비법으로 서로의 칼끝을 겨누며 촌각을 다투는 사투를 벌인다는 자체가 어쩌면 우리네 인생살이의 축소판이지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잘 쓴 ‘바둑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마력이 있다. 요즘도 나는 대한민국 바둑계의 지존으로 꼽히는 조훈현이나 그의 제자로 스승을 밟고 지나간 이창호, 그밖에 유창혁이나 이세돌 같은 거의 대중 스타급 바둑 명인들은 물론이고 별 알려지지 않은 프로바둑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즐겨 읽곤 한다.
그렇기에 오늘 아침신문에 나온 ‘조훈현VS 오자와’의 대국(對局)사진을 보는 순간 생면부지의 조훈현9단에게 전화를 걸어 단걸음에 인터뷰를 마쳤던 것이다. 그도 ‘기습적인 전화 인터뷰’에 잠시 놀랐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귀한 시간을 내준 조훈현 9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2009년 12월14일 스카이뷰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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