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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사퇴요구와 오바마 연설-어메이징 그레이스

스카이뷰2 2015. 6. 29. 13:48

 

                                           

  흑인교회 장례식장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고 있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뉴시스 다음뉴스사진)

                                          

       (다음뉴스 자료사진제공)

 

 

 

유승민 사퇴요구와 오바마 연설-어메이징 그레이스

 

 

대한민국 국민이 한국 대통령을 비롯한 그 수하 정치인들의 ‘유치한 정쟁’으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미국 대통령의 ‘노래 한곡’으로 정서적 힐링을 받았다는 건 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오바마와 6천여명의 흑인 조문객들이 부른 ‘어메이징 그레이스(놀라운 은총)’ 열창 장면덕분에 잠시나마 평화로운 기분을 느꼈다.

 

웅혼한 합창이 뿜어내는 성스러운 기운에  울컥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용서의 봇물'이 밀려오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 며칠 간 한국 정치인들 탓에 생긴 스트레스로 불편해졌던 마음 한 켠이 스르르 녹아내리면서 강퍅해졌던 정서가 치유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국대통령 오바마의 노래 연설 덕분이다. 고마운 오바마다.

 

지난 6월 25일, 하필이면 ‘6.25전쟁 발발 기념일’에 여당 원내 사령탑 유승민을 정조준한 여성 대통령의 서슬 퍼런 질타는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 나 같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깜놀할’ 뉴스였다. 요즘 애들 말로 그야말로 ‘심쿵’했다. 정적을 공격하는 여성대통령의 목소리에는 한치의 용서도 없었다. 웬만한 사내대장부라도 오금이 저릴만큼 무서웠다. 왜 아니겠는가!  

 

 이 나라 최고 권력자가 그렇게 노기 가득한 음성으로 야당도 아닌 여당 원내대표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중인환시리에 찍어버린 이번 ‘사건’은 아마도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인 듯싶다. 그만큼 대통령의 ‘말 폭탄’은 진중권의 말처럼 ‘월하의 공동묘지’같이 오싹한 기운을 내뿜었다. 아마도 당사자인 유승민은 물론 지금 한창 높은 지지율로 차기대권의  단꿈에 젖어 있었을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도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 같다.

 

그날 이후 오늘 아침까지 꼭 닷새간 ‘평범한 한국인’인 나는 유승민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동정 반, 스트레스 반으로 마음이 좀 무거웠다. 우리 여성 대통령의 독기 서린 ‘6.25 폭탄발언’은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우리 속담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그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아 보인다. 일반 국민에겐 '유승민 찍어내기'보다는 메르스 침공이 더 공포스럽다는 걸 대통령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메르스로 온 국민이 한달 넘게 고통 받고 있는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느닷없이 그런 무서운 발언을 왜 했는지, 그 ‘저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낸다는 건 우리네 백성들에겐 꽤 난해한 고차원적 정치방정식이다.

웬만큼 상식 있는 일반인이라면 국난(國難) 수준으로 대한민국 국민을 괴롭히고 있는 ‘메르스 역병’이 창궐하고 있는 이 시절에 최고 권력자라는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 국민에게 사과하고 국민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집권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부르며 ‘다음 선거 때 국민이 심판해달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는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보수 진보를 가릴 것 없이 온갖 매스컴 에선 ‘히스테리 부리는 듯한’ 여성 대통령과 유승민의 ‘애증의 10년사’를 무슨 ‘막장 드라마’처럼 계속적으로 보도해 웬만한 국민들은 그 스트레스 성 뉴스에 한참을 시달려야 했다. 좀전 뉴스에 따르면 드디어 여성대통령이 그토록 미워하는 유승민은 집권 여당 원내대표직에서 결국 쫓겨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해서라도 나라가 편안해진다면야 오죽 좋으련만 아무래도 이건 ‘비극적 서곡(序曲)’에 불과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한국 국민이 정치인들의 집안싸움으로 이렇게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매력적인 저음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상처받은 미국 흑인들은 물론 머나먼 한국 땅에 사는 평범한 국민의 마음까지 치유해줬다는 건 ‘오바마의 정치적 리더십’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렇잖아도 오바마는 치유의 리더십 소통의 리더십의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탁월한 정치인이기에 ‘불통’이 트레이드마크인 한국 대통령과 비교한다는 그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이다. 박대통령이 노래 한곡으로 사회통합을 이뤄낸 오바마를 '사숙'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어메이징 그레이스, 얼마나 감미로운 말인가. 나 같은 불쌍한 사람을 구했지. 한때 길 잃은 양이었지만 지금 인도해주시고 한때 눈이 멀었으나 이제 나 볼 수 있다네.”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국 성공회 존 뉴턴 신부가 흑인 노예무역에 관여했던 자신의 과거를 눈물로 참회하고 이 죄를 사해준 신의 은총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성가다.

 

사실 이 찬송가는 언제 들어도 눈물이 핑 돌게 하는 ‘치유의 힘’이 있는 것 같다. 오바마 역시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이 찬송가를 백인에 의한 흑인교회 난사사건으로 9명이 목숨을 잃은 찰스턴 흑인 교회 장례식장에서 ‘예고 없이’ 부르면서 장례식장에 참석한 6천여명의 조문객들의 눈물과 환호를 불러냈다.

 

‘치유의 리더십’이 뛰어난 오바마로선 어쩌면 당연한 선곡이었을 것이다. 미국 언론들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 것은 한 편의 서사시였다”고 높이 평하고 있다. 유력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슬픔과 승리, 은총이 뒤섞인 오바마의 특별한 날’이라며 오바마의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그의 정치적 지지도를 높이는데 큰 효과를 봤다고 보도했다. 그날 흑인교회 장례식장은 슬픔보다는 위안과 평화가 가득했다면서 미국 언론들은 일제히 "오바마 대통령 재임 중 최고의 순간"이라는 찬사의 보도를 아끼지 않고 있다. 멋진 정치적 풍경이다.

 

대통령의 노래 한곡으로 사회통합을 이뤄내고 있는 미국에 비해 방금 나온 대한민국 여론조사에선 박대통령에 의해 ‘찍어내기 당할 운명’인 유승민의 사퇴에 반대한다는 여론이 60%에 가까웠다. 그만큼 일반 국민들 눈에도 대통령의 ‘무리한 찍어내기’가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여성대통령은 유승민을 '자기정치'를 하려하는 '못된 정치인'으로 낙인 찍었다는데 사실 정치인은 원래 누구라도 '자기 정치'하는 게 기본 아닌가 말이다. 이 나라 정치는 꼭 대통령 한 사람만 독점해야하는건지 의문이 든다는 사람들도 많다. 

 

박대통령은 자기정치 하는 사람들을 혐오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한나라당 의원 시절 세종시 문제로 이명박대통령과 정면으로 각을 세우면서 결국은 세종시 문제를 자기주장대로 하게 만들었다. 이런 게 '자기 정치'가 아니면 어떤게 자기 정치인지 모르겠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는 속된 말이 생각난다.

 

정치란 원래 인간의 본능적 영역으로도 볼 수 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에 대통령이 자기 정치한다는 이유로 유승민을 파문시킨다는 건 자가당착이고 자기 모순이다. 자기 정치를 금기시 하겠다는 건 어쩌면 민주주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야당의원들은 이런 박대통령을 향해 '제왕적 대통령'이라며 비판하고 있다.심지어 한 야당 정치인은 '한국 정치는 대통령의 식민지냐'라는 날선 지적도 하고 있다. 여야 정치인들이나 일반 국민들 조차 대통령의 유승민 찍어내기에 대해 그만큼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얼마전 박대통령의 원로자문그룹 7인회의 멤버라는 김용갑은  ‘대통령이 국민을 걱정해줘야 하는데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해주는 상황이다’고 한탄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오죽했으면 '친박중에 친박'이라는 인사가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  대통령은 그 큰 권력을 쥐고도  뭐가 그리 아쉽고 불안해서 유승민 같은 '아랫사람'을 찍어내지 못해 안달이었는지 궁금하다.

 

제발 이제 일반국민은 생업에만 신경 쓰면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정치가 잘 풀려야 국민이 편안하다는 건 만고진리 아니겠는가 말이다.  어쨌거나 미국 대통령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노래 한 곡으로

자국민은 물론 한국 국민의 정서적 고통마저 치유해주는데 비해 한국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해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게 어쩐지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