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성남 판교에서 직접 서명하고 있는 박대통령. 대통령이 이런 서명운동에 나선건 역대 처음이다.
서명을 마친뒤 두산 박용만회장과 나란히 선 박대통령.
서명 연명부 위에서 세번째 칸에 '박근혜 종로구 청와대로 1'이라는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보인다.
자고나면 처음 듣는 어이없는 이야기들이 신문지면과 온라인 뉴스에 경쟁적으로 뜨고 있는 나날이다. 부모가 자식을 살해했다는 너무 끔찍한 사건이 신문 1면에 대서특필되는가하면 '국회 건너뛰고 거리로 나간 대통령'이라는 드라마틱한 제목이 신문 맨 위쪽 한가운데 여봐란듯이 새겨져 있다.
놀랐다. 여지껏 수많은 정계 소식을 듣고 봐왔지만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이 힘없는 무슨 시민운동가들처럼 이 엄동 설한에 길거리로 뛰어나가 법안통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직접 '박근혜, 청와대로 1'이라는 친필 서명을 했다는 건 그야말로 이제껏 듣도보도 못한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누구인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최고지도자 아닌가 말이다. 그 큰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요 몇년새 가장 추웠던 1월18일, 청와대에서 한참 먼 곳에 있는 성남시 판교까지 가서 '길거리 서명'을 했다는 건 1월 19일자 동아일보 사설에도 나왔듯 '헌정사에 기록될 만한 날'인 것 같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그런 적은 없다는 점에서 가히 '역대급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같은 평범한 국민이 알기로 그런 서명운동이란 아무 권력도 없는 시민들이나 운동권들이 '최후의수단'으로 해왔던 일종의 '생계형 정치행위'다. 헌데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알려진 '여왕급' 대통령이 몸소 청와대로 1이라는 주소까지 써가면서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단체들이 주관하는 경제활성화 입법촉구 1천만 서명운동’에 참여했다는 건 아무리 봐도 적절한 처신은 아니었다고 본다.
지난해부터 대통령은 툭하면 짜증스런 표정까지 지어가면서 국회를 비판해왔다. 배신의 정치 운운하면서 국민이 꼭 심판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끝내 새누리당 원내대표 유승민을 파문시키기도 했다.
며칠 전 연두 담화발표와 기자회견장에서도 '국민의 힘'을 강조하면서 국회를 심판해주시라는 요지의 발언을 매우 강경한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사실 좋은 노래도 세번 들으면 지겨워진다는데 대통령의 이같은 국회비판은 솔직히 이젠 좀 그만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부하다. 그런 와중에 어제 대통령의'서명 행차'는 웬만한 상식을 가진 국민들을 놀라게 했고 실망감을 안겨줬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청와대 참모들이 대통령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의 애국심이야 이미 거의 모든 국민에게 인정받았을 만큼 대단한 경지에 있다. 하지만 그런 돈독한 애국심이 그녀의 정치적 능력이나 리더십을 보증해주진 못한 것 같다. 이 자리에서 최고 권력자를 폄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단지 대통령이 저렇게 혹한의 거리로 뛰쳐나가 힘없는 시민운동가처럼 고작 서명운동이나 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보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서명하는 자리에서 “얼마나 답답하시면 서명운동까지 벌이시겠습니까' 저도 노동개혁법과 경제활성화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했는데도 안 돼서 너무 애가 탔는데, 당사자인 여러분들은 심정이 어떠실지 생각이 들어 힘을 보태드리려고 이렇게 참가를 하게 됐고, 국민들과 경제인 여러분들의 마음이 잘 전달됐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 비정규직이나 힘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애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대통령이 그토록 안타까워한 ‘경제활성화 입법촉구 1천만 서명운동’은 대한상의와 전국경제인연합회·중소기업중앙회 등 38개 경제단체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정작 '노동자 그룹'과는 정반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용자 그룹'들의 움직임이어서 자칫 대통령의 서명운동 참여가 한쪽 편만 들어주는 모양새라는 비판을 듣기 쉽다는 지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서명운동에는 대한노인회와 바른사회시민회의 등 주로 보수단체들이 참여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까 당연히 '대통령을 전폭 지지하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주창하는 서명운동이라는 게 가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민노총을 비롯한 노동 단체나 정부에 비판적인 시민단체들 눈에는 전혀 온당치 않은 서명운동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대통령이 그토록 간절히 통과를 원하고 있다는 노동시장 개편 법안은 ‘쉬운 해고’ 등 노동자들의 고용불안 우려로 국회에서 여,야간 논란이 되고 있고,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이른바 ‘경제활성화법’ 역시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할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여야가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가뜩이나 대통령이 '재벌편'을 든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고 있는 시점에서 대통령이 이번 서명운동을 주도한 대한상공회의소 박용만회장과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사진은 불난 곳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힘없는 노동자들의 염장을 질렀다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본다.
이에 대해 '김종인영입효과'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는 더민주당은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와 본분을 망각한 잘못된 판단”이라며 때만난 듯 유감을 발표했다. 시인 출신의 더민주당 대변인은 “대통령의 서명운동 참여는 그저 국민 한 사람분의 서명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국회에 대한 압박이다. 대통령이 국회를 설득해 막힌 정국을 풀 시간은 없어도 국회를 압박하기 위해 생뚱맞은 서명운동에 참여할 시간은 있는 것인지 개탄스럽다”는 비시인적 건조한 논평을 내놨다.
정부에 대해 쓴소리 트윗을 자주 날려온 한 역사학자는 조금 전 트위터(@histopian)를 통해 대통령을 향해 “재벌 옆에서만 ‘국민의 한 사람’이 된다”며 “세월호 유가족이나 해고자 가족,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심정에는 공감은커녕 적대감을 보이던 분이, 재벌들의 심정에는 공감한다”며 “그의 ‘공감’이 있는 곳에, 그의 ‘정체’가 있다”는 쓴소리 트윗을 날렸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법안 통과를 위해 수시로 야당 의원들에게 전화하고 함께 밥먹으면서 '소통 정치의 달인'이라는 평을 들어왔다. 그에 비해 박대통령은 취임후 이제까지 야당 지도부와는 고작 6차례 만났고 '단독 회견'은 단 한 차례도 하지 않은 진기록을 경신중이다. 야당이나 국회와 이토록 거리를 둔 대통령으로서 '길거리 서명정치'에 매달린다는 따가운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대통령이 국회를 경시하고 비판만 한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는 지적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통령은 이런 쓴소리는 애써 들으려하지 않는 대신 엄동설한에 길거리로 뛰쳐나가 '애국적 희생정신'을 보여주며 국민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듯한 '하소연 정치'를 펼치고 있는 것이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상황이다.
새해로 65세를 맞은 대통령에게 '훈수'를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1월 19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같은 의견을 가진 다수의 군중 뒤에 서기보다는 반대파를 설득해 국정에 동참시키는 사람이 진짜 정치인이다'라는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진짜'라는 수식어가 눈길을 끈다.
평소 대통령편으로 알려진 보수신문마저 이런 논조를 펼치고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의 서명운동 동참은 '하수(下手)의 정치'였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제발 대통령은 자기편은 물론이고 반대편과도 서로 터놓고 솔직하게 대화하는 소탈한 '소통의 정치'를 보여줬으면 좋겠다. 무슨 왕정시대도 아닌데 대통령 앞에서 그 누구도 제대로 발언을 못하는 분위기라면 그건 대통령 자신에게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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