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왕들의 서예 솜씨는 탁월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어필(御筆) 현판, 나무에 새긴 임금님의 큰 글씨’ 전시회에 선보인 작품들은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적 예술성'마저 느껴진다.
5백년전 조선 임금님들의 예술적이면서도 현란한 서예 '실력'을 21세기 서울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시 공간을 초월한 역사문화여행으로써 꽤 품격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기회인 듯하다.
이 전시회에선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시대 제14대 왕 선조, 16대 인조, 19대 숙종, 21대 영조, 22대 정조, 23대 순조, 24대 헌종, 25대 철종, 26대 고종 등 임금님 아홉분의 친필을 새겨 만든 현판 15점을 볼 수 있다. 눈이 호사를 누릴 '특별한 역사문화여행'이다.
조선 시대 왕들은 세자시절 대부분 '기본적'으로 서예를 익힌 덕분인지 그 솜씨가 뛰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온 명나라 장수에게서 글씨를 요청받았다는 선조의 필체는 지금 봐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듯하다. 창덕궁 후원 영화당에 걸었던 ‘간취천심수(看取淺深愁)’ 현판에선 선조의 '정치적 고뇌'를 느낄 수 있다. ‘내 마음의 근심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의 이 현판에선 선조의 예민한 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것 같다.
요즘 사극 드라마 '대박'에 등장하고 있는 숙종은 조선 후기 임금 가운데 가장 글씨를 잘 쓴 임금으로 평가받는다. 경희궁 용비루에 걸었던 ‘교월여촉(皎月如燭)’, 즉 ‘달이 촛불처럼 밝다’는 의미의 현판은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넘치는 숙종의 글씨를 잘 드러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장희빈과 민중전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난'이 함축된듯한 숙종의 글씨체에선 묘한 매력마저 풍긴다. '멋'을 아는 사나이로서 숙종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아들을 뒤주에 가둬죽인 파란만장한 '패밀리 히스토리'의 주인공 영조는 어필 현판을 많이 제작케 하고 형태와 제작 방식에까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한다. 어필 현판은 통치자로서 국왕의 권력과 존재감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다. '무수리 어머니'에 대한 컴플렉스에 시달렸던 영조에겐 '국왕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함으로써 그런 컴플렉스를 벗어버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번 전시에 나온 영조 어필 ‘건구고궁(乾九古宮)’ 현판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기거한 창의궁 양성헌에 걸었던 것이다.
호방한 성품으로 알려진 정조는 열 살 어린 나이에 젊은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숨져가는 끔찍한 상황을 직접 목격했고 할아버지인 영조를 향해 '아비를 살려주소서'라고 울부짖었던 '비운의 왕세자'출신이다. 정조는 세자시절이나 즉위 후에도 늘 '암살'에 시달려선지 '무예' 특히 활쏘기에 심취했다고 한다. 49세 젊은 나이에 급서한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외쳤던 애처로운 고사의 주인공이다.
'정조 어진'을 보면 거의 장동건 급 미모의 잘 생긴 '용안'이 눈길을 끈다. 무예도 뛰어났지만 그의 형형한 눈매에선 예술적 재능마저 느껴진다. 이번 전시회에 선보인 '득중정' 역시 정조가 1790년 화성에 머물면서 4발의 활을 모두 명중한 걸 기념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 나온 왕의 친필 글씨인 어필御筆로 만든 현판에는 작은 글씨로 ‘御筆’이라고 새겨 누구든 그것이 어필임을 알게 했다. 어필 현판은 통치자로서 국왕의 권력과 존재감을 보여주는 상징적 기능도 했다. 어필 현판은 특별히 여닫이 형태의 문을 설치하기도 하고, 현판을 비단으로 덮어씌우기도 했다. 그만큼 '왕'의 존재감은 절대적이고 대단했던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 국민으로선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