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채식주의자 영문판 표지.
5월17일 대한민국 매스컴 뉴스는 한강(韓江)이라는 올해 마흔 일곱살 여성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소식으로 뒤덮였다. 노벨상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라는 이 상을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 최초로 받았다는 게 뉴스 밸류를 더 높여줬다.
한강은 터키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과 중국의 옌렌커, 앙골라의 호세 에두아르도 아구아루사, 이탈리아의 엘레나 페란트, 오스트리아의 로베르트 제탈러 등 6명의 쟁쟁한 작가들과 겨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노벨상 작가까지 이긴 대단한 저력이다. 맨부커상 선정위원회는 『채식주의자』의 선정 이유를 "압축적이고 정교하고 충격적인 소설로 아름다움과 공포의 기묘한 조화를 보여줬다"고 밝혔다.
시상식장에서 블랙 원피스에 검은 스타킹 까만 구두까지 신은 '긴머리 소녀'같은 모습의 한강이 수상대에 오르는 장면은 대견스럽고 보기 좋았지만 어딘지 애처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 내부에 수십년간 내재해왔던 '80년 광주 5월'의 트라우마 탓일지도 모르겠다. 큰 슬픔을 알고 있는 인간의 뒷모습이 살짝 느껴졌다.
1970년 전남 광주태생의 한강은 어쩌면 '5.18 광주항쟁일'을 기념하기 위해 그런'상복(喪服)'차림으로 머나먼 런던까지 갔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광주, 5.18'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사로잡아온 주요 테마였던 것 같다. 작가 스스로 독자들이 이번 수상작 '채식주의자'보다 '소년이 온다'를 더 많이 읽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로 '광주 태생' 작가 한강에게 5.18은 치유해야할 트라우마로 자리하고 있었던 듯 싶다.
『채식주의자』는 2007년에 출간된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등 소설 3편을 하나로 연결한 연작 소설집이다.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에선 이 '채식주의자'소설책이 1분에 8권이 팔려나갈 정도로 그야말로 날개돋힌듯 팔리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수상소식 전날보다 무려 30배나 많이 팔린 거다.
수상소식이 전해진 당일 하루동안 교보문고와 인터넷 서점에서 5천권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5월18일 점심무렵 광화문 교보문고엔 '채식주의자' 영문판과 한강의 다른 소설집은 있는데 '채식주의자'는 '품절상태'였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대형 인터넷서점에선 5년 동안 1109권 팔린 책이 단 하루에 1만권을 넘어섰다고 한다. 2007년 출간 이후 9년 동안 6만여부 팔린 책이 불과 며칠 사이 25만부의 주문이 쏟아졌다니 대단한 판매실적이다. 세계 문학상 수상작'의 브랜드 파워라고나 할까...
사실 '채식주의자'는 수상소식이 전해지기 전엔 그리 잘 나가는 소설은 아니었다. 흥미진진한 대중소설이 아닌 '문학성 높은' 작품은 원래 판매 성적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더구나 한강의 이 작품은 단숨에 읽어내려가기가 매우 고통스럽다. '작가의 피'가 스며있는 듯한 섬세한 묘사력은 독자를 고문하는 듯하다.
문학청년들에겐 '단비'같은 탁월한 문체지만 나이든 사람들이나 문학에 별 취미없는 사람들은 독파해내기 어려운 문장들이다. 이제까지 잘 팔려온 대중소설과는 격이 다르다. 문장 하나하나가 공들여 쓴 것처럼 아름답다. 고급소설의 품격이 느껴진다.
어쩌면 작가 자신도 이런 문장을 한딴한땀 써내려가면서 고문을 받는 듯 괴로워 했을 것이다. 그만큼 한강의 문장력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정교하다. 그런 '고난도의 문장력'의 매력이 맨부커상 심사위원들의 심장을 움직였을 것 같다. '극한의 고통 속에 느껴지는 쾌감'이라고나 해야할까. 한강의 문체 하나하나는 매우 공들여 수놓은 수공예품 같다. 거의 질식할 것만 같은 문장력은 그만큼 작가의 내공이 깊다는 얘기다.
아마도 작가는 그런 작품을 쓰고 나면 몸져 누웠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문장 하나하나가 치열했다. 독자에게 고통을 안겨줄 정도로 예리한 칼날 같은 그녀의 작품을 끝까지 읽어내는 건 웬만한 독자들은 어려울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책이 날개돋힌듯 팔려나간다는 건 '세계 3대 권위'의 문학상이라는 '매력'이 어필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젠 한강의 작품들은 지난해 '신경숙 표절사태' 이후 독자들의 한국문학 외면으로 침체의 늪에 빠졌던 한국 문학계에 윤활유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한강은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작가인 아버지 한승원이 집에 가져온 사진첩을 통해 5.18의 진실을 처음 알게됐다고 한다. 사진첩에서 잔혹하고 끔찍한 참상을 목격한 소녀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 트라우마는 작가가 된 그녀에게 '해결해야할 숙제'로 자리 잡았다고 고백했다. 그렇게해서 태어난 작품이 그녀의 6번째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였다. 한강은 한 인터뷰에서 5,18로 인해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한강은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밀려오는 밀도 높은 감정들로 하루에 세 줄 이상은 쓰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벌을 받는 기분으로 써 내려갔다는 소설 '소년이 온다'는 1년 반에 걸쳐 완성됐다고 한다. 별로 길지 않은 분량의 경장편이었지만 그날 광주에서 죽어간 어린 생명들의 절규를 빙의하듯 기록한 그녀로서는 그만큼 고뇌와 고통을 느꼈을 테고 완제품을 내놓을 때까지 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전남도청 상무관에서 시신 수습을 돕는 선주와 은숙, 끔찍한 고문의 기억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다 간 진수, 그리고 친구의 죽음을 목도한 중학생 동호까지 면면도 다양하다. 어린 아이들마저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됐다는 건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어린 생명들의 '피맺힌 절규'를 해부하듯 정밀하게 묘사해냈다는 건 작가가 무척이나 힘들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섬뜩한 문장력은 소름돋을 정도다. 그렇다고 거칠지도 않은 속삭이는 듯한 호소력이 이 소설의 백미다. 광주에서 스러져간 어린 영혼들에게 받치는 진혼곡 같다.
94년 등단 이래 한번도 '베스트 셀러' 작가는 아니었던 한강은 맨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대번에 '제일 잘 나가는 작가' 로 이름을 올렸다. 그녀의 이번 문학상 수상은 집단우울증에 걸려있던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촉촉한 단비로써 힐링 역할을 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 시인으로 먼저 데뷔한 한강의 시 같은 고밀도 문장력이 반짝이는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작은 행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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